안녕 미소여, 안녕 조소여, 라고 말할 수 없는 곳
1
이미상의 『이중 작가 초롱』을 뜨문뜨문 읽고 있다. 펼칠 때마다 거침없고 경쾌하고 동시에 냉소적으로 웃기는 문장을 읽으며 유쾌하게 출발한다. 이내 써늘해진다. 과연 젊은 작가답다. 감탄스럽다. 단문 위주의 문장이라 잘 읽힌다. 그러다 울컥해진다. 그게 함정이다. 잘 읽혀서 그저 방심하고 웃다가, 어느새 칼날에 창자가 베이는 느낌. 이미상 작가로 인해 조금 울적해진다. 뭔가 세대 차이 같은 걸 감지한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쓰는구나, 낡아 버린 나는, 이토록 참신한 스타일로는 죽어도 못 쓰겠지, 하고 중얼거린다. 무서움도 아니고 만만함도 아니다. 머, 굳이 표현하자면 부러움과 초조함과 거리감이 5 : 3 : 2 비율로 뒤섞인 느낌. 여기서 거리감은 싫다는 뜻이 아니라 낯설고 새롭다는 긍정적인 의미에 가깝다. 물론 나의 경우엔 그러하단 뜻이며, 다른 분들에겐 친밀함과 즐거움이길!
2
브런치 시작하고 한 달 보름 정도 지난 듯하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시작한 일인데, 예전에 쓴 것들을 다듬다가 마음이 평온해졌다는 게 브런치가 내게 준 보답이라면 보답이다. 브런치에 올라온 작가님들의 글을 빠르게 이것저것 읽으며 많은 것을 얻고 느낀다.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 그런데, 어떤 작가 분은 일상적이거나 사적인 이야기가 올라오는 글들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뭐, 그런 입장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의 저자 트리시 홀의 의견을 지지한다. 이 책은 제목만 보면 작법 책 같다. 살짝 아니다. 작법을 논하기보다 글쓰기와 편집에 관한 저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에세이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일반 작법 책보다 유용하고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조언들이 많다. 감동적일 때도 있다. 저자는, 논픽션을 쓸 때도 개인적인 아픔이나 상처 같은 지극히 사적인 내용을 더할 때, 스토리가 강력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 스스로가 그런 식으로 글을 쓴다. 몇 년 전 서점에서 아래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심장이 잠깐 멈춘 듯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을 구입하지 않고선 도저히 서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자신이 작가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느낀다. ‘운명’이라고 해서 더 나은 글을 쓴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남보다 일찍 깨닫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글의 세계에 더 빨리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 바로 내 경우가 그랬다.
비교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대다수가 말하는 과거의 삶이 그렇듯, 나 또한 끔찍할 때가 많았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었다. 펜실베이니아 주 동북부의 어느 비포장도로 위에 내 부모가 직접 지은 단층 주택에서 책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빠가 길 건너편에 살던 내 친구 프레드의 엄마와 캘리포니아 주로 떠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내가 여덟 살 무렵까지는 그곳에 살았으니 분명 그 집에서도 책을 읽긴 했을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 후 우리는 약 8킬로미터 떨어진 외할머니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 트리시 홀의『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에서
결론은 간단하다. 다른 작가들이 무얼 쓰든 나는 환영이다. 글쓰기의 세계에서 어떤 영역이나 한계를 지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의 글에 전략적으로 영역과 한계를 지우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타인의 글에 대해 굳이 그런 토를 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그것들을 읽은 감상은 좋았기에.
3
오후에 시간을 내어, 하비에르 마리아스의『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를 다시 펼치고 여기저기 뒤적였다. 어느 글에서 인용했던 문장을 확인하려고 했다. 아무리 찾아도 그 문장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인용한 문구가 과연 이 작품의 것이었나? 맞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하지만 여기,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다른 문장을 옮기는 건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은 잊혀지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진다.
우리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얼마나 적은 부분만 남겨져 있는가!
게다가 그런 것들조차
미끌미끌한 눈처럼 쓸모없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 각자의 시간에는 얼마나 적은 흔적들만 남아있는가!
이런 적은 것들 중에서도 많은 것들이 얘기되지 않는다.
심지어 얘기되는 것들 중에서도 극히 적은 부분들만이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시간의 뒤편,
혹은 시간의 검은 등을 통과하기 위해,
천천히 우리의 소멸을 향해 여행한다.
시간의 등,
그곳은 우리가 끊임없이 생각할 수도 없고,
계속 작별 인사를 할 수도 없는 곳이다.
"안녕, 미소여, 안녕, 조소여. 난 너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고, 너도 나를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안녕, 열정이여. 안녕, 기억이여"라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 하비에르 마리아스의『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에서 마지막 단락 문장.
4
소설을 왜 읽느냐고 내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마지막 문장을 만나기 위해 읽는다고.
소설을 왜 쓰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똑같은 답변이 가능하다.
마지막 문장을 만나기 위해 쓴다고.
아이돌 음악을 왜 듣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안녕, 열정이여, 라고 지나간 내 청춘에게 작별하기 위해 듣는다고.
안녕 미소여, 경멸이여 안녕,
이라고 아직 말할 수 있다는 게 가끔은 기쁘다.
이 작품은 구조가 경이롭다. 마리아스는 탐정소설을 정반대로 써나간다.
시작 부문에서 범죄를 보여주고, 그 다음 실제로 일어난 일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마리아스의 최고의 이 소설에서 연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의미 관계는 눈부시다.
《뉴욕 타임즈 북 리뷰》
죄책감과 기억을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고 매력적으로 다루는 심리소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놓을 수 없다.
《댈러스 데모크래트》
깊은 밤 느리고 천천히 읽다가, 걷잡을 수 없는 우수와 비애에 빠진다.
《IanX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