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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hyun Nov 28. 2020

5년 전 오늘_2

그 두 번째

아침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는 응급실 복도에 계셨다. 지금 나타나는 증상의 원인을 알려면 CT를 찍어야 하는데 기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CT를 찍고 처치를 받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고민이었다. 추가 처치가 필요하다면 집 근처 대학병원이 아닌 원래 다니던 종합병원으로 환자 이송 신청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본래 진료하던 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병원에선 아버지를 부담스러워했다.


이런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아빠가 CT를 찍겠다고 하셨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자고 하셨다. 그렇게 추가로 CT를 찍었고, 그 결과 달리 손 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병명과 원인 등 의학적인 세부 사항을 듣기는 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아침에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응급실 복도에 나와 아버지 단 둘이 있을 때 응급실 복도에서 아빠가 말씀하셨다.


"돌아보니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다 하나더라."


아버지가 남 메시지이다.


얼마 뒤 응급실 안 격리실(환자만 들어갈 수 있는 음압 병동 같은 곳이 아니라 이름만 격리실인 그냥 방이었다. 당시는 2013년)에 자리가 났다고 연락이 왔다. 아빠에게 결핵이 생겼기 때문에 본디 환자를 격리해야 하는데 응급실 내 격리실마저 모자라 그동안 복도에 계셨던 것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고 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이게 가능했고, 전날 의사인 친척 아저씨가 말씀하셨듯이 아빠는 워낙 몸이 약해져 전염력도 거의 없는 상태이긴 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실제로 그 대학병원에서 온 가족의 결핵 검사를 무료로 해 주었는데-법으로 정해진 거라고 한다-다행히 아무도 전염되지 않았다.


격리실에 들어가자 갑자기 보호자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응급실 복도에 환자와 보호자를 그냥 방치했으면서... 마스크는 불편했지만 복도가 아닌 공간에서 아빠와 우리 가족이 조용히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오전에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낸 뒤 엄마가 병원으로 오셨다. 몇 달 간의 간병 경험으로 우리는 알고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건 교대로 해야 한다는 걸. 세 사람이 애를 태우며 함께 간병하는 것보단 순서를 정해 한 명씩 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걸.


간밤에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오느라 잠을 설친 건 모두 같았지만 가장 먼저 쉬어야 할 사람으로 식구들은 나를 꼽았다. 제일 젊으니 가장 씩씩하고 팔팔해야 하는데, 사실은 잠을 잘 못 자면 힘들어하고 밤도 잘 못 새는 사람이라는 걸 가족들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 휴식을 취했다. 잠을 자고 나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다시 병원으로 향하기 전, 현관 입구에 걸린 커다란 가족사진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아버지 얼굴도 찍었다. 이 행동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아버지가 그날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만약 아빠가 그날 돌아가실 걸 미리 알았다면 오히려 찍지 않았을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빠 사진을 내 휴대폰에 담았고, 몇 시간 뒤 그 사진은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2018.11.22




이 글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5년이 지난 에 적은 글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을 풀어놓고 싶어 는데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못 그대로 묵혀 두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내가 병원으로 돌아갔고, 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하셔서 언니가 메로나를 사서 드시게 해 드렸고, 언니와 내가 교대로 점심을 먹었고, 평소 아버지의 세례를 간절히 바라셨던 엄마가 생각나 내가 아버지께 묵주기도를 소리 내어 드려도 되겠냐고 물었고, 아버지가 좋다고 하셨고, 묵주 기도를 시작하며 가톨릭의 교리를 압축한 사도신경을 외우자 아버지가 '아멘('그러하다'라는 긍정의 의미)'이라고 자발적으로 대답하셨고, 그럼으로써 대세의 조건(가톨릭의 교리를 담고 있는 사도신경을 읊어 주면 대세 받는 사람이 거기에 동의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충족되었고(여기까지는 집에 다녀오기 전 격리실에서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니 정확한 순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녹즙과 차가버섯 달인 물이 마시고 싶다고 해 엄마와 언니가 그걸 가지러 집에 갔고, 그동안 병원 의료진이 찾아와 심정지 시 기도삽관과 심폐소생술을 할 것인지 물어보았고, 아버지는 의식을 잃어 가는 상태에서도 본인 손을 들어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받지 않겠다 서명하셨고,


갈수록 호흡이 힘들어지던 아버지가 코로 연결된 인공호흡기가 부족했는지 이걸 더 강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셨고, 더 이상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의료진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의료진이 아주 예외적으로 코 인공호흡기 외에 입으로 연결된 인공호흡기를 더 달아 주었고(이렇게 코와 입 모두에 인공호흡기를 다는 경우는 없는데, 임종을 앞두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뭐라도 해 주려는 마음으로 의료진이 허락한 것 같았다. 이 점이 정말 고마웠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담당자가 들어와 두 개의 인공호흡기를 수거해 갈 때 나는 울면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보는데 아빠 코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하자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엄마와 언니에게 전화해 얼른 병원으로 빨리 오라고 얘기했고(나중에 호스피스 교육을 받을 때 임종 직전 증상 중 식은땀이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런 지식이 없었지만 기력 없이 의식을 잃어가던 아버지 코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보니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엄마와 언니가 돌아온 후 엄마는 아버지께 대세를 주셨고, '스테파노'라는 자신의 세례명을 듣자 의식을 잃어가던 아버지눈을 꿈뻑거리셨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 손을 나누어 잡고 오래도록 그 손을 놓지 않았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 오빠들이 격리실로 찾아와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했고, 아무런 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던(산소호흡기를 제외하곤 우리가 모두 떼 달라고 했다. 산소포화도가 점점 낮아지니 기계들이 수시로 경고음을 울렸고, 불필요한 주사 바 선아버지 손과 발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는 걸 충분히 알았을 때 의료진을 불러왔고, 의료진은 아버지 상태를 확인해 보더니 그 시각을 사망 시각으로 기록했다는 내용이다.


감정을 빼고 사실만 적었는데도 아주 긴 기록이다. 2년 전만 해도 그 감정이 더 생생했기에 사실과 감정을 함께 기록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7년이 지나고 나니 슬픔의 감정도 많이 무뎌져서 이젠 여기다 그 감정을 쏟아내지 않고 사실만 기록해 두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병원에서 보호자를 불러 언니가 후속 절차를 밟으러 격리실에서 나갔는데, 그 사이 의료진이 들어와 아버지 위로 삼각형의 높다란 회색 커버를 씌웠다. 모든 환자에게 그렇게 하는 것인지, 결핵 증상이 있던 환자라서 그렇게 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그 회색 커버 안에 들어가 밖으로 보내지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봤는데, 수속을 마치고 돌아오던 언니는 높은 회색 커버가 씌워진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무리 사망 선고를 받았어도, 다시 인사할 기회 없이 눈앞에서 사라진 아빠. 그때 언니가 무척 슬퍼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2년간 묵혀 두었던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된 계기는 친구 때문이다. 친구의 동생이 지금 말기 암에 걸려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인데...


살면서 자주 경험하기 힘든 가족의 죽음이지만, 먼저 그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친구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이미 공유했고, 이 글을 친구에게 직접 보낼 것 같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


11월 위령 성월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고 특별히 기도하는 달


먼저 떠나는 사람들을 잘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또 잘 살아갈 수 있기를....



* 못다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아버지는 간암 말기였지만 호흡 곤란으로 돌아가셨다. 원래 간암이 악화되면 복수가 차고 섬망이 오고 신체적 고통이 무척 심하다는데, 아버지는 그 전에 호흡기 이상이 생겨 돌아가셨다. 숨쉬기는 힘드셨겠지만(그래서 돌아가시기 1주일 전 공기 좋은 요양원에 가고 싶다고 하시고, 격리실에서 코로 산소가 공급되고 있는데도 다른 조치를 취해달라고 하셨던 것 같다) 몸의 다른 부분 고통은 비교적 덜 느끼고 돌아가신 것 같다.


같은 병이라도 증상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마지막의 모습도 다른 것 같다. 아픈 사람들,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평화로움 속에서 이별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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