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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17. 2020

황홀이 덮인 도시를 걷다

훗날 인레를 떠올리면 느긋한 표정의 우리가 기억나겠지


세 번째 도시, 인레


새벽 공기에 덜덜 떨며 도착한 숙소에서 수영을 하고 자전거로 마을 구경을 한 게 전부였던 어제. 그런 긴긴 하루를 보내고 찬란한 아침을 맞는다. 마음이 안정되었을 줄 알았건만 감정의 소용돌이는 잠잠해지지 않는다. 창밖의 나무와 주황빛 잎은 그리운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 둔다. 당분간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기로 했으니.





한낮의 인레. 짐을 맡기고 시장이 있는 곳으로 걷는다. 아침엔 그렇게 춥더니 해가 뜨자마자 온기가 퍼진다. 청명한 하늘 아래, 꽃과 론지, 과일을 파는 곳에 닿는다. 가게 앞을 지키시는 할머니께 여쭤본다. “Hello. How much this one?” 그녀는 느릿느릿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500짯. 바나나와 오렌지 두 개가 겨우 350원이라니. 인레 시장은 인심이 좋은 걸까, 아니면 물가가 낮은 걸까. 여행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지만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다. 과일이 든 봉지를 품에 안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뜨거운 햇살 아래 더위와 전쟁한다. 뒤에 있는 보트가 출발해야 호수로 나갈 수 있기 때문. 얼마 후 엔진 소리가 나고 바람이 몸을 감싼다. 평화로운 호숫가. 한 시간쯤 달린 보트가 로투스 가든에 정착한다. 연꽃과 실크, 솜으로 된 옷감을 파는 가게를 구경하는 시간이다. 다양한 색감의 실이 늘어진 나무판 옆에서 할머니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신다. 건물 안의 사람들은 줄기로 실을 만들거나 배틀 앞에 앉아 스카프를 짜고 있다. 발로 페달을 몇 번 밟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걸 보니 뜨개질과 비슷한 듯하다. 스카프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이틀 동안 작업을 한다는 인레 사람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수많은 옷감을 만들어낸다는 건 존경할 만한 일이다.


오후 다섯 시, 호숫가에서 과일을 먹으며 물 위의 시간을 헤아려 본다. 비가 많이 내리면 집이 잠기진 않을까? 식당에 가려면 꼭 배를 타야 할까? 그 많은 음식은 어디서 어떻게 배달되는 걸까?라는 몇 개의 물음을 품은 채. 어느덧 해질 무렵. 태양은 가까운 곳에서 산의 꼭대기를 물들이고 있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 인레의 밤은 위험하다. 해가 지면 엄청난 추위가 몰아치기 때문. 로투스 가든에서 산 스카프 두 개를 어깨와 다리에 감싼다. 물 위로 황소 떼가 헤엄쳐 다니고 석양이 밤을 알린다. 어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오전 열 시, 체크 아웃 후 자전거를 빌린다. 첫 번째 목적지는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잉따욱 브릿지. 인레의 작은 마을을 벗어나 차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도로가 좋아서 속도를 내기 수월하다. 자전거가 익숙한 빈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하다. 길가에는 아주 큰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해바라기 정원을 지나면 코코넛 주스를 파는 가게가 보인다.


우리가 멈춘 곳은 어느 학교 앞. 나무 평상에 모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자전거를 세운다. 내가 “밍글라바(안녕)!”하고 외치자, 그들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알고 있는 단어가 몇 개뿐이라 영어와 미얀마어를 섞어서 대화를 시도한다. 그들은 올해 5학년이 되었다며 우리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다나카를 잔뜩 바른 볼이 어찌나 귀여운지, 웃음을 멈출 수 없을 정도다. 커다란 나무 옆에 나란히 모여 여름 햇살을 느끼는 장면. 나는 이곳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Can you give me your note?” 한 아이는 머뭇거리다 담장으로 다가와 노트를 건넨다. 빈 종이에 작은 마음을 전한다. - MINGLABA. :) NICE TO MEET YOU! -

글자 아래 초록색 론지를 입은 5학년 아이들을 그려서 노트를 돌려준다. 노트 주인은 대단한 걸 받기라도 한 듯 모두에게 자랑하고 열 명도 넘는 학생들이 그걸 돌려 보며 까르르 웃는다. 어쩌면  단어로 국경을 넘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스러운 인레의 어느 초등학교. 아마도 나는,  순간을 가장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해바라기 정원보다, 빛나는 갈대보다  눈부시고 아름다웠던 이들의 미소를 오랫동안 기억해야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보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작은 식당과 노점, 높은 나무들을 지나쳐 목적지에 도착한다. 호수 위의 쉼터에서 한국어로 인사하는 미얀마 사람을 만난다. “저는 매일 한국어 공부해요. 영어보다 조금 잘해요.” 그는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작은 마을에도 많은 꿈이 있다.


오후 한 시쯤, 초록 대나무로 지어진 가게로 향한다. 곧 화려한 점심 식탁이 차려진다. 레몬 갈릭 소스를 곁들인 생선 요리와 매운 볶음밥, 과일 주스 두 잔. 고수와 레몬이 잔뜩 들어간 생선은 실패했으나 볶음밥이 맛있다는 이유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이 정도면 성공한 점심이라며.


마을 구경을 마친 후에는 다시 자전거를 탄다. 가끔씩 대형 화물차가 내뿜는 거대한 매연에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 이곳의 자연은 그걸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얼마 후 오전에 갔던 학교에 도착한다. 교실과 복도를 배회하는 아이들에게 두 팔을 흔들자 그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인사한다. 손키스를 날리기도 하고 하트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런 감사한 시간을 뒤로하고 페달을 밟는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 훗날 인레를 떠올리면 느긋한 표정의 우리가 기억나겠지. 인도 음식점에서 먹었던 펜네 마살라와 갈릭 난,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 헤매던 오후도. 수영을 하거나 쏟아지는 별을 보던 어느 날, 지는 해를 두 눈에 담았던 호숫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았던 오늘이 희미하게 피어오를 테고. 모든 게 소중한 조각이 되어 청춘의 한 순간이 아름답게 물들게 되기를.


안녕, 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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