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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12. 2020

여름 한 조각

시작과 끝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기록하다.

아카시아 나무 옆에서 초록잎을 들여다본다. 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냄새와 흔적이 있다. 당신과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산책을 하는 것. 그가 남해에 있을 때는 그저 상상으로 그쳤던, 간절한 바람이던 순간이다. 그 뜨거움의 온도가 미지근해졌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빠지곤 한다. 서로의 곁에 있다는 당연한 사실만으로.

사실 매 순간 애틋하거나 낭만적인 건 아니다. 밤 산책을 하며 투닥거릴 때도, 유치한 말싸움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에도 심장 소리를 들어보라며 호들갑을 떨거나 얼굴을 매만지며 사랑을 말한다. 그 순간의 전율이 우리를 더 깊이 묶어주는 걸지도 모르고.


집으로 향하던 길, 완연한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 양상추로 착각한 양배추와 단호박을 품에 안은 채. 행복한 상상도 잠시, 지하철 역을 나설 때쯤 작은 비명을 질렀다. 난데없는 먹구름이 몰려왔기 때문.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많은 이가 걸음을 멈춘 저녁 무렵, 누군가는 전화를 걸었고 누군가는 우산을 팔았다. 그리고 우리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마도 청춘의 무모한 달리기는 함께라는 이유로 가능했으리라.

유월의 어느 날, 빈이 요리를 하는 동안 나는 포도를 씻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얼마 후 양배추를 썰어 넣은 쫄면과 카레가 식탁 위를 장식했다. 느릿느릿 만찬을 누린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사는 엄마, 그다음은 당신이라고 확신하면서.


조금씩 쌓여 온 피로 탓일까. 허기가 졸음으로 이어졌고 갑작스러운 두통 또한 온 신경을 자극했다. 당신은 내 곁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잔잔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고. 그 순간이 어쩐지 꿈만 같아서, 넘치도록 고마워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사랑받고 또 사랑하면서 우리가 흘려보내는 여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길게는 4년 반, 짧게는 5개월. 내가 당신의 변화를 지켜본 날들은 결국 숫자에 불과했다. 이태리어의 기초를 배우던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을 나열하려면 기억의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꺼내야 할 테니까. 그간 흘린 한숨이나 눈물을 잠시 잊기로 한다. 서툰 반주자의 실패도, 철없는 대학생이 즐긴 일탈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늘, 학교 밖에서 건배를 외쳤던 새내기가 이렇게 매일 연습실에 붙어있을 줄이야.

열아홉, 아주 어렸던 그때의 우리는 매일 아침 새롭게 피어났다. 다른 언어를 공부하고 연주회를 핑계로 심야 영화를 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땡땡이를 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숱한 계절이 지나 교정을 벗어날 때가 된 지금. 모두의 기억 속에 마지막 무대는,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가 빛났던 한때를 잊지 못할 테니까.




당신이 짧고 단정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내게로 온 오후 한 시, 몇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함께 호흡을 맞춘 무대 위의 리허설, 꼬막이 든 도시락과 샐러드를 나눠 먹으며 떨었던 저녁 무렵. 우리는 이토록 낯선 시간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무대로 나갈 수 있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연주를 준비하라는 종소리가 울릴 때? 이제 내가 할 일은 작게 기도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뿐이다.

비가 내렸다. 마음은 차분하고 느슨해졌다. 어쩐지 뜨거운 여름에 지친 날들을 위로받는 것만 같아서.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갔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던가. 고요 속에서 숨을 가다듬는다. 긴 적막 끝에 사랑의 노래가 번졌다. 건반을 쓰다듬는 손길 위로 겹치는 떨리는 목소리와 마지막 단어. 곧 황홀의 밤이 시작되겠지.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는 옷소매를 걷고 당신의 손을 잡았다. 우산 아래 낭만이 흘렀다. 어깨가 젖어도 행복했으니. 그는 고맙다는 말을 열 번쯤 하고 나서야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쩌면 우리의 여름은, 지금 막 시작된 걸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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