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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Dec 19. 2020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40일차]


소소하게 주어진 휴일.


머릿속에는 여전히 차나칼레의 먹거리 위시리스트가 많이 남아 있다.


'남아 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나의 음식을 기억해뒀다가 먹으러 찾아가면서, 두세 개의 새로운 위시리스트가 생긴다. 그래도 그건 긍정적인 사실이다. 이제 겨우 40일차다. 아직 140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먹을 식당이 떨어져 내 유일한 낙이 사라지면 안 된다.


피곤한 몸과 들뜬 마음으로 오늘도 차나칼레로.


오늘 향한 곳은 차나칼레 외곽에 위치한 아울렛인 부르다 17 AVM.


원래는 계획에 전혀 없었는데(있는 줄도 몰랐다), 때마침 탄 버스에서 같이 일하는 한국인 반장님 두 분을 우연히 만났다. 그분들도 차나칼레로 가는 길. 큰 현대식 쇼핑센터가 있다고 해서 은근슬쩍 미행하듯이 따라다니다가 일행이 되었다.


낯선 문화권의 세계를 살아가다가 문득 이렇게 익숙하고 현대적인 공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들, 익숙한 구조, 익숙한 물건들을 보면 전지구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문명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아쉬운 마음도 든다. 이렇게 익숙한 공간에서는 '모험'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장님들이 옷과 신발, 주방기구 등의 실용적인 물건들을 둘러보는 사이, 내 시선을 뺏은 것은 바로 해리포터 코너. 말하는 모자와 골든 스니치, 각종 마법 지팡이가 보인다. 만약 해리포터를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나이에 접했었다면, 내 방에도 저런 지팡이가 하나쯤 있었겠지.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해리가 처음 학용품을 준비하면서 지팡이를 고를 때의 장면이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우면서도 무척이나 매혹적인 그 이동이 해리포터란 작품의 핵심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걸 터키에서 볼 줄은 몰랐다. 이것도 환상일까. 샾에 들어가 빗자루를 하나 구입하면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지팡이는 무엇인가요


쇼핑이 길어지면서 반장님들이 점심으로 사주신 버거킹 햄버거.


식당에 갈 때마다 마요네즈와 오이를 빼 달라는 주문을 하는데(아예 그런 문구를 터키어로 번역해서 핸드폰 대기화면에 박아 뒀다), '원래 안 들어가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특히나 햄버거 같은 마요네즈 1급 경고 음식에서는.


대충 '고기고기'한 이름이었는데 정말로 풀쪼가리 하나 들어가 있지 않은 완벽한 고기 햄버거다. 치즈와 패티와 햄. 어릴 때면 좋아했겠지만 좀 머리가 컸다고 이런 건 뭔가 밸런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햄 맛이 선명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터키에서 먹는 버거킹은 물론 한국과 메뉴가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딘지 익숙한 레파토리의 버거를 보며 또 하나의 '모험'을 잃은 것 같아 내심 아쉽다는 기분이 든다.


점심 시간이 좀 지나서 숙소로 다시 돌아간다는 반장님들(어쩌면 자꾸 붙어다니는 날 떨어뜨리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지만!)과 헤어져 이번에는 외곽에서 걸어서 차나칼레 시내로 들어가기로 한다.


공원을 지나 다리를 지나고,


고양이도 지나고.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본다. 한가로운 주말에 터벅터벅 '집'에서 걸어 나와 터줏대감처럼 자리잡은 작은 슈퍼에서 콜라를 한 병 사서 마시며 이곳에서 사귄 친구네 집으로. 지나가는 터키인 아주머니에게 귀나이든(좋은 아침), 하고 인사도 하고. 경계심 없는 웃는 얼굴과 목소리로 '귀나이든'하는 답인사도 받고.


어쩌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만.


나라마다 다른 신호등을 보는 것도 아기자기한 즐거움이다


대충 걸어서 무사히 익숙한 차나칼레 시내로 도착.


어느 순간부터 여행에 자신감이 생긴 건, 오래 전 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를 무작정 보고 걷기만 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경험 이후였다. 목적지까지 가는 교통수단이 무엇인지, 표를 끊는 방법은 뭔지, 길을 물으려면 그 나라 말로 뭐라고 해야 할지, 입장료는 있을까, 돌아올 땐 어떻게 하지.


그런 것들이 다 필요 없었다. 멀리서 뭔가 보인다 싶으면 무작정 그 방향으로 걷기만 하면 언제나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길엔 가장 효율적인 정해진 교통수단으로 갔을 때는 겪을 수 없는 의외의 일들이 가득했다. 설령 목적지에 결국 도착하지 못하거나 영업을 하지 않는 상태라고 해도, '모험'이라는 진짜 목적을 달성할 순 있었다.


오늘 차나칼레행의 진정한 목적. 생선 튀김집인 Sardalye로 다시 한번 찾아가서 '함시(멸치 같은 작은 생선)' 튀김을 주문한다. 실은 저번에 왔을 때 주문하고 싶었던 것이 이거였는데, 그때는 이름을 제대로 몰라 정어리를 주문해버렸다.


함시는 터키의 국민생선 중 하나다. 크고 통통한(멸치 기준의) 터키 멸치라고 해도 좋을 함시는 터키의 생선가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생선가게 주인들이 특유의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할 때 굳이 꼽아서 외치는 것도 함시다. '함시~ 함시!'.


통째로 튀겨 먹는 생선종류에는 좀 거부감이 있지만, 다행히 머리도 내장도 손질되어 얌전하게 즐길 수 있는 튀김이다. 먹어보니 맛도 굉장히 담백하고 얌전하다. 은은하게 고소한 맛도 나고. 맥주를 잘 즐기지는 않지만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만큼 좋은 안주가 있을까 싶다. 양도 많아서 야금야금 집어먹어도 한참동안 먹을 수 있다. 그래도 빵과 함께 먹기는 맛이 진한 정어리가 더 어울리는 느낌.


함께 주는 신선한 야채도 좋았는데, 너무 많이 줘서 따로 준 한 팩은 그냥 버린다. 너무 싱그러운 야채여서 죄책감이 든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이번에는 해안을 따라서 끝까지 가본다. 아파트촌이 나오고 언덕길이 나온다. 또 모험심이 발동해 언덕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러,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겨울이지만 마침 날씨도 좋아서 금방 땀이 나는 게 느껴진다.


언덕의 정상에는 벅스 바니가 있었다.


누가 올까 싶은, 테마 파크를 꿈꿨던 작은 놀이터.


망해버린(내 일방적인 편견이다) 이런 놀이동산에는 특유의 스산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있다. 벅스 바니의 해맑은 표정과 눈빛에서 왠지 모를 광기가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놈은 정체를 숨기고 있다. 배에 그려진 괴기스러운 미소를 보라. 여기서 놀던 어린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허튼 상상은 그만하고, 내려오는 길.


터키의 아파트들은 과하지 않게 알록달록한 것이 낡았음에도 예쁘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내려오는 길에 보물같은 악기점을 발견한다.


내심 악기 하나쯤 가져오려고 하다가 그만뒀는데, 현지에서 살 기회가 생기게 될 줄은 몰랐다. 앵커리지의 토끼굴의 가공할만한 증폭 효과를 즐기기엔 휘파람만으로는 부족하던 차였다. 다음 바람이 부는 날 앵커리지에서 혼자만의 공연을 하기 위해 악기를 하나 구입한다. 휘파람조차 그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가 났는데, 과연 이 악기를 쓰면 어떤 소리가 날지.


구입한 그 악기의 정체는...


차후에 공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소소한 음악 취미 생활로 이끌었던, 나름 자신있는 악기라고만 이야기해두겠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해리포터 지팡이일지도.


배가 약간 꺼진 것 같아서 위시 리스트 중 하나였던 버블 와플을 주문한다.


원하는 토핑을 마음껏 넣을 수 있다고 해서, 좋아하는 것들만 넣는다. 일단 누텔라 가득.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딸기와 바나나(초코와 바나나는 무척이나 어울리는 조합). 그리고 으깬 견과류로 마무리. 그 외에도 고를 수 있는 토핑이 많았지만 하늘색 핑크색 같은 알록달록한 것들은 먹는 것에 넣지 않는 주의라 패스.


과연 기대했던 대로 폭신하고 맛있다. 지나가는 꼬맹이가 먹던 것을 보고 얼마나 먹어보고 싶던지.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메뉴다.


돌아가기 전에 시켰던 귤렌 피데집의 케밥버거. 위시 리스트의 메뉴를 하나라도 더 먹어보기 위해서 배가 무척 부르지만 무리하게 시켰는데 아무런 감동도 맛도 없다. 위시 리스트의 노예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준 메뉴. 못 먹고 가면 눈앞에 어른거릴 거 같았는데 적어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외에도 노가다 필수 아이템인 워머도 새까만 걸로 두 장 구입. 간만에 쇼핑을 해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가지고 귀가 한다.


이제 남은 위시 리스트(오늘 생겼지만!)는 오늘 마련한 내 하얀색 마법 지팡이를 토끼굴에서 쓰게 되는 것.


앵커리지로 갈 날이 기다려진다. 바람아 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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