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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Feb 03. 2021

'좋아한다'

[92~94일차]


Seviyor : 좋아한다


초반에만 살짝 하다가 바쁜 일정으로 인해 소홀해진 터키어 공부.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들여다보는 정도로 배우던 차에 최근에 '좋아한다'라는 단어를 익혔다.


좋아한다, 라는 말을 알게 되자 갑자기 나는 터키인들과 어느정도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게 되었다.


케밥 좋아해? 생선 좋아해? 회 좋아해? 양고기 좋아해? 닭고기 좋아해? 영화 좋아해? 자동차 좋아해? 랍세키 좋아해? 이스탄불 좋아해?


소개팅을 할 때 괜히 '뭐 좋아하세요?'라는 뻔한 말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처음 배운 요즘 새롭게 느끼고 있다. 좋아한다는 것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 수가 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장피에르 죄네 감독의 약 7분짜리 단편영화 <쓸모없는 것들(Foutaises)>을 보면 '좋아한다', '싫어한다'라는 것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그리고 싫어하는 것. 그것들은 그냥 서먹한 사이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별 의미 없이 물어보는 것들이 아니라, 훨씬 더 본질적인 것에 닿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수도 있다. '저는 매운 걸 좋아해요'라고 답하는 말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중요한 무언가가 들어있다.


좋아하는 것은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꺼린다. 좋아하는 것을 1이라고 하고, 싫어하는 것을 0이라고 설정한다면, 우리는 근사한 2진수 언어를 얻을 수 있다. 컴퓨터를 생각해보면 2진수 언어로 못할 것이 (거의)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끝없이 나열하다보면, 어쩌면 한 인간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저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래서 최근에 적극적으로 좋고 싫은 걸 묻고 다닌 결과,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터키인들은 고기류를 양>소>생선>닭 순으로 좋아한다는 것(닭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는 표정에 인상을 약간 섞으며, '뭐.. 그냥저냥' 정도의 의미로 말한다).


생선이나 고기를 '회'로 먹는 것은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진지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건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야).


탄산음료보다는 아이란(물탄 요구르트에 소금을 섞은 터키 국민음료)을 좋아한다는 것.


돼지고기는 종교적인 이유를 넘어서, 그냥 역겨워하며 싫어하는 것.


자신들에게 소리지르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한국인 반장님들의 기본 특성).


그리고 세대를 불문하고, 누구나 차이(터키의 홍차)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


차이가 식을까봐 천으로 꽁꽁 동여맨 주전자가 귀엽다

쉬지 않고 일해야하는 업무 속에서도, 터키인들은 반드시 어떻게든 차이를 마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다. 전기선을 창고에서 끌어와, 준비된 전자포트와 주전자를 들고, 종이컵과 각설탕이 잔뜩 들어 있는 종이상자와, 설탕을 넣고 휘저을 나무스틱 까지 마련해서. 나이 많은 제밀 아비도, 이제 스무살을 조금 넘은 까불이 사멧도, 차이는 언제나 좋아한다. 단지 넣는 각설탕의 개수가 다를 뿐.



차이를 주고 제대로 마시는지 멀리서 감시하는 키 큰 메멧(좌)과 쥬루프(우)


또한 그들은 내 배를 터뜨려 버리려는지, 쉬지 않고 내게도 차이를 강권한다. 터키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차이만큼은 강권하는 문화다. 마실 걸 자주 마시면 오줌이 빨리 마려워져서, 오랜 시간 기계 앞에서 무전을 받으며 작업을 해야 하는 우리 윈치수들에게 차이는 반갑지만은 않은 존재다. 어떤 분은 12시간 동안이나 화장실을 참아 보았다고.


때문에 나는 차이를 권유받을 때마다 내가 아는 모든 터키어 표현을 동원하서, 아니야, 필요 없어, 괜찮아 고마워, 없어, 아냐, 아냐, 하고 거절을 해보지만, 그들은 타맘 타맘(오케이), 하며 돌아서면서도 마치 못 들었다는 듯이(어쩌면 차이를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차이 한 잔을 만들어서 가져다준다.


기왕 왔으니 조금 홀짝거리고 옆에 뒀다가 다음 차이 러쉬가 올때 그걸 가리키며 '아직 다 안 먹었어' 하면 또 진지하게 손을 내저으며 '그건 식었어, 뜨겁지 않아'하고 또 한 잔을 준다. 점점 내 옆에 쌓여가는 차이. 신호가 오는 방광. 참을 만큼 참다가, 나는 결국 무전을 한다. '윈치수, 화장실 가도 될까요?' 덕분에 나 하나로 인해 작업 중지. 그리고 대기.


그렇다고는 해도 차이를 싫어하나? 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다. 비록 아무리 먹어도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이 떫고 쓰지만, 무척이나 추운 날 벌벌 떨면서 야간작업을 하던 중에 건네주는 (최대한) 뜨거운 차이 한 잔을 수면에서부터 호로록 마시면, 몸인지 마음인지 그런 어딘가가 뜨겁고 든든해지는 느낌이 든다. 계속 먹다보니 버릇이 되었는지, 은근히 차이가 기다려지는 순간들도 있다.



같이 일하는 터키인 작업자들 중에 유난히 눈이 가는 친구는 '키 큰' 메멧이다. 동명이인인 두 메멧 중에서 키가 유난히 커서 붙여진 이름인데, 뭔가 슈퍼마리오의 동생인 루이지 같은 느낌이 있다. 키 크고, 싱겁고, 착하고, 조용하고 쑥스러운 듯하면서도 장난기가 많다.


남들은 장갑을 두 개씩 끼는 추운 날에도 맨손으로 작업을 하고 담배를 말아 피운다. 설렁설렁 놀면서 하는 것 같으면서도 영리하게 일을 잘 한다. 차이에 각설탕은 무려 여섯 개를 넣는다(제밀 아비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촉(아주) 프로블렘!'한다 ).


제밀 아비(형) 옷 소매에 그리스(윤활유)를 묻혀서 화난 제밀 아비가 정색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데도, 돌아서며 나를 보고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히히, 하고 소리 내어 웃는다. 그러면 한쪽이 썩은 앞니가 유난히 돋보인다.


나는 그의 히히, 하고 웃는, 그 수줍고도 장난스런 웃음이 좋다. 날마다 입는 회색 옷과,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후줄근하게 늘어지는 그의 실루엣, 말수가 적으면서도 반갑게 나를 맞아 주는 조용한 살가움. 이곳 앵커리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꼽으라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또 하루는 간만에 식당(언제나 근무지에서 도시락으로 배달을 받아 갈 기회가 별로 없다)에 식사를 하러 갔더니 갑자기 식사를 나눠주던 터키인 배급원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 터키어로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당연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음료수를 냉장고에서 맘대로 하나 꺼내 챙겨서 그런건가. 그러더니 휴대폰을 꺼내서 어떤 여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또 뭐라고 뭐라고 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아저씨는 마침내 번역기 앱을 돌려서 내게 어떤 문장을 보여준다.


'그녀는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잠깐 이해가 안 되다가, 이해를 하고는 웃는다. 식당에 온 적도 별로 없는 데 언제 마주쳤던 걸까. 좋아'했다'는 말은, 지금은 이곳에 없다는 말일까. 가져주는 관심이 고맙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데, 아저씨는 다음 말을 적어 보여준다.


'시간이 되면 내일 아침 식사 시간에 이야기를.'


그러겠다고 했다가, 내일은 휴일이라고 말을 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뭐 결론을 말하자면 이후로 딱히 다른 일은 없었다. 나는 식당에 다시 갈 기회가 별로 없었고, 가끔 가더라도 아저씨는 바쁜 와중에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차피 3개월 후에는 돌아갈 몸. 풋풋한 스토리는 없는 걸로.



그런 나날을 보내던 차에 은근슬쩍 새로운 윈치수 모집공고 이야기를 흘렸던 고향 친구 JB에게서 연락이 온다. 이야기가 잘 되어 JB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비록 3개월만 근무가 겹치게 되겠지만 낯선 땅에서 익숙한 친구를 만날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기도 한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음식을 먹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마음에 들고 좋은지를 말할 곳이 없다는 것.


드디어 먹거리를 함께 탐방할 친구가 생기게 될 것 같아서 조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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