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아이 Apr 27. 2021

외도하는 노동자

[157일차]

휴일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 원래대로라면 이미 지금쯤 이 좁은 동네인 랍세키와 겔리볼루와 차나칼레(차나칼레는 좀 크긴 하지만)의 맛집을 모두 섭렵했어야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상 조건이 악화되지 않는 이상 공사를 멈추지 않는 이곳의 특성 때문에, 체감상 절반 정도는 휴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 같다. 그나마 비와 눈바람이 몰아치던 겨울에는 휴일을 좀 받았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봄이 되니까 날씨도 좋아지고 공정도 기상에 영향을 덜 받는 쪽으로 바뀌어서 이젠 거의 멈추지 않고 달린다.


컨트롤룸에 입성한 뒤로는 대체할 인원도 없이 빠듯하게 돌아가서, 한 달간 한 번도 휴일을 받지 못하고 출근(거의 매일 연장근무는 덤)한 적도 있다. 뭐 휴일에 근무하면 돈으로 주니까 손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연속적으로 일을 하면 정신이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거기다가 코로나 봉쇄로 갇혀서 공사장과 숙소만 왔다갔다해야 했던 시절(3달 정도였나)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휴일날 밖에 나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외출한 날은 하나하나 다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귀한 휴일을 맞아 나는 또 차나칼레로 간다. 오늘은 터키인 여자친구와 반지를 맞추러 차나칼레로 가는 G와 함께 버스를 탄다.


G의 여자친구를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처음 알바생들끼리 전화 유심을 맞추러 나가던 날 스쳐본 적은 있다. 가성비 통신사 보다폰에서 유심을 하나씩 사서 원시인 신세를 벗어난 우리들은 우가우가 신이 나서 떠들며 랍세키의 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G가 지나가던(?) 터키인 여자와 별안간 오래된 친구처럼 어깨동무(인지 허리에 손인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뭐지 극한의 인싸인가'하는 생각에 놀라서 그걸 보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G의 약혼자였다는 것. 랍세키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G는 이미 로밍을 해서 우리 중 유일하게 핸드폰을 할 수 있던 차였다) 부랴부랴 G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 제대로 마주한 것인데, 그래봤자 다들 마스크를 낀 신세라 제대로 얼굴을 마주쳤다고 하기도 애매하긴 하다.


뭐 혼자인 나도 봉쇄기간동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짝이 있는 친구들은 오죽했을까. 그래도 생이별이 끝나고 그들이 이제 자유롭게 만나는 걸 보니 마음이 훈훈하다.


차나칼레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심상치 않은 추위가 느껴진다. 분명 최근엔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로 따뜻한 봄날씨였는데.. 남방 위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나온 G는 내리자마자 여자친구에게 야단 맞는다. '옷을 그렇게 입고 나오면 어떡해.'


시내까지 함께한 우리들은 이제 각자의 길로. 오늘의 여행은 혼자다. 그동안 지나친 식당이나, 먹어보지 못했던 아쉬운 메뉴를 찾아 다닐 것이다. 자유롭게.



지나가다가 눈이 멈춘 곳.


적당한 공간에 의자와 탁자가 자리잡고 있는 걸 보면 왠지 마음이 흐뭇해진다.


아마도 그건 과거에 했던 하우징과 인테리어 시스템이 있던 게임에서 기인한 습관일 것인데, 그 시절엔 다른 사람들이 꾸민 (게임 속)집이나 인테리어 사이트에 들어가 베스트로 뽑힌 인테리어들을 하염없이 구경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집을 인테리어 해본 적은 없지만.


인테리어 요소가 있는 여러 게임들의 공통점은 바로 의자와 탁자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 현실에서도 그 법칙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발코니든 테라스든 방이든 사람이 사는 것 같이 보이려면 의자와 탁자가 정갈하게 놓인 그 모습이 필수요소다.


종교적 불문율과 같은 이 '의자와 탁자'의 콤비는 심지어 전혀 그것의 본래 실용적인 기능을 하지 않더라도, 어디에든 놓여서 '그럴싸함'을 연출하곤 한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장소에, 사람이 앉으면 부서질 것 같은 의자와 탁자라도, 그저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의 눈에 보기 좋았더라.


물론 저 의자와 탁자는 정말로 누군가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아마도 근처 시간이 많이 남는 할아버지가 담배와 함께 시간을 태우러 오는 전용석이겠지.


오늘의 점심은 맥도날드다.


한국에도 있는 맥도날드를 굳이 터키까지 가서 먹어야하나 싶지만, 맥도날드 매장이야말로 각국마다 현지화되어 차별성이 살아 숨쉬는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감자튀김만 맛을 봐도 한국과 무엇이 다른지 바로 감이 올 것이다.


주문한 것은 쿼터파운더 치즈. 마요네즈를 못 먹어 치즈버거만(피클 빼고) 시켜 먹던 내게 쿼터파운더란 구원과 같이 내려온 햄버거. '패티에서 이상한 외국 고기 맛이라도 나면 어떡하지(기대)~'라고 생각하며 한입 물었더니.. 뭐야 한국하고 똑같네.


최근에 한국에서는 쫄깃하고 광택나는 빵으로 바뀌어 약간 다르긴 하겠지만 바뀌기 전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똑같다. 패티든 치즈든 수분이 좀 없어 메마른 느낌이 든다는 사소한 기분상의 차이만 빼면. 쾨프테 버거 같은 특수 메뉴를 시켜봤어야 했나. 그래도 뭐 간만에 그리운 맛을 느꼈으니 나름대로 만족.


배를 채우고 또 걸어본다. 놀이 동산의 인형가게처럼 생긴 예쁜 식당도 구경하고.


여기도 '의자와 탁자'의 법칙은 예외가 없네. 이렇게 인테리어에 나름 신경 쓴 곳에서는 의자 등받이 커버 하나도 의도 없이 놓인 것은 없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봐줄 것이라 생각하고 발품을 팔아 커버를 고르고 의자에 씌운 누군가의 야무진 손길을 생각하면 이런 풍경도 보기에 즐겁다. 잿빛 콧수염에 수줍음이 많은 배불뚝이 아저씨일까. 히잡을 쓴 애연가 아주머니일까.



좀 가보지 않은 곳을 걸어보려 했지만 참고 참다가 너무 추워서 얼른 보이는 카페로 피신한다. 두터운 집업 후드 안엔 얇은 반팔티 한장이 다다. 하다못해 긴팔티나 내복만 입고 왔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차이를 한 잔 시키고 몸을 녹인다. 비닐막 너머로 나를 잡아먹을 듯 냉기와 바람이 불어오지만 그래도 그 막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버틸만 하다. 함께 나온 로쿰과 쿠키는 보내는 시간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차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간식겸 식사를 하나 시킨다. 이건 추워서 먹는 거다. 추워서..


터키에서는 파스타를 파는 가게를 은근히 찾기 힘들다. 레스토랑이나 음식점보다는 보통 이렇게 '카페cafe'이름을 달고 있는 가게에서나 파스타를 간신히 볼 수 있다. 유행인지는 모르겠는데 한국과 다른 점은 '펜네' 파스타가 굉장히 대중적이라는 것. 펜네 아라비아따는 기본 토마토 스파게티(나폴리탄이라는 말을 쓴다)와 함께 거의 항상 있는 메뉴 중 하나다. 아라비아가 가까워서 그런가ㅎㅎ. 어쨌든 오늘은 펜네 아라비아따를 하나 시킨다.


내게 파스타의 의미는 무척 특별하다. 해외여행 중 가장 즐거운 순간이 있다면 틀림없이, 파스타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하겠다. 하나라도 더 다른 파스타를 맛보는 것, 이것이 내 탐식 여행의 제 1목표라고 할 수 있으니.


마침내 나온 이곳의 펜네 아라비아따는 음. 역시 아직까지 먹은 바로는 터키는 파스타만큼은 후진국인 것 같다(시골동네라 그런지). 터키 파스타의 특징 하나. 알덴테 없이 푹 익혀 흐물흐물하다. 둘. 소스가 약하고 싱겁다. 뭐 본연의 맛을 추구하기 위해 소스가 묽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밀가루 본연의 맛을 느끼고 싶지는 않고.. 겉은 그럴싸해보이는 이곳의 펜네 아라비아따는 좀 실망. 밑에 깔린 드라이토마토를 씹을 때만 뭔가 맛이란 게 탁 나더라. 이스탄불 정도 가면 다르려나. 그래도 익힌 밀가루를 하나씩 질겅질겅 씹어먹는 것 자체는 즐거웠으므로, 만족. 내게 파스타면 뭐라고 해도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으니 온기가 유지되는 동안 잠시 밖을 다닐 수 있다. 힘을 내서 밖으로 나와 또다시 바람(그래, 바람 부는 날에만 휴일이 존재할 수 있다)과 추위와 싸운다.


넓은 공원을 발견해서 한번 들어가본다. 찌그러진 원형으로 생긴 공원은 길이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뚫려 있어서 발 닿는대로 걷다보니 금방 길을 잃게 된다. 아니 이게 뭐라고 여기서 길을 잃네.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 나. 치트키인 구글맵을 쓰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핸드폰이 끊긴지 2개월째다(터키는 자국에서 구입한 핸드폰이 아니면 3개월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 이번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원으로 진입. 뱅글뱅글 돌다가 기어코 빠져나온다.


사실 길을 잃은 게 아니다. 이게 다 배를 꺼뜨리기 위해서다.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



목소리가 귀여워 찍은 고양이.


당연하지만 목소리는 사진으로 촬영이 안 된다.


위장에 빈자리를 조금 마련하자마자, 나는 차나칼레의 단골집인 Sardalya(터키어로 정어리)로 간다. 아무리 맛있는 케밥이라도 그것만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케밥 특유의 그 고기맛이 슬슬 물릴 때는(케밥 먹는 노동자인데..) 이렇게 해산물 튀김 집도 간혹 들러서 입을 씻어 준다. 가장 좋아하던 이스켄데르 캐밥도 삼일 연속으로 먹고 배탈이 난 뒤로는 어쩐지 손이 잘 안 간다.


한 끼를 제대로 먹긴 어렵고, 적당히 간식거리나 할 생각으로 홍합 튀김인 미디예 타바를 시킨다. 시키고 나니 생각보다 양이 좀 많다. 아직 배가 다 꺼지지도 않았는데.


이럴 땐 위장이 아니라 입으로 먹으면 된다. 일단 입에 집중해서 맛있게 먹고 목구멍으로 삼키고 나면, 그 다음은 위장이 알아서 하겠지. 난 모른다.


갓 나온 튀김을 포크로 딱 찍어 바사삭 하고 먹는 그 순간, 그 순간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늘 새로워. 짜릿해. 어디선가 인간이 바삭거리는 식감을 본능적으로 즐기는 이유는 선사시대에 벌레를 먹던 경험이 이어져온 것 때문이라는 걸 봤던 게 갑자기 생각난다. 마침 튀김이 뭔가 동그랗게 생긴 게 딱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티몬과 품바도 왠지 생각나고. 아냐. 이럴 때 바람직한 상상은 아니다. 조상님들은 그냥 선사시대부터 튀김을 해먹었던 거다.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레몬도 뿌려먹고, 야채와 함께 빵에도 넣어 먹는다. 해산물과 빵을 함께. 터키에서 내 식생활의 불문율이 하나 깨진다. 생각보다 좋은 조합이다. 아직은 레몬이 필수.


야외석이라서 바람을 실컷 맞으며 식사를 했더니 맛은 있지만 입이 돌아갈 지경이다.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정도지만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하고 랍세키로 후퇴하기로 한다. 휴일이 아깝긴 하지만 이건 아니야. 가끔 몸도 쉬어줘야 하긴 하니까.


그러고보니 오늘은 케밥 근처에도 안 갔다. 케밥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렸나. 이렇게 딴거 먹는 노동자가 되고 말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피스타치오 한 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