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아이 Aug 17. 2021

둘째 날, 천사를 만났다

이스탄불



늦지 않은 아침에 숙소를 나섰다. 날씨가 좋았다.


까마귀 한 마리가 봉투 밖으로 터져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쪼아먹고 있었다. 아침 햇빛을 오랫동안 받은 음식물 쓰레기는 따뜻해 보였다. 나는 호텔 앞 돌블럭 길 위에 우두커니 섰다. 그 순간까지도 내겐 정해진 목적지나 계획이 없었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사치스럽고 행복했다.


7년 전의 터키 여행에서 이미 봐야 하는 것들을 다 봐둔 상태였다. '봐야 하는 것들'이라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단어였다. 그래도 그 덕분에 7년 뒤의 '오늘의 나'는 자유로웠다.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이스탄불에는 며칠 동안 있을 것인지, 그다음엔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15일 뒤 날짜로 잡힌 한국행 비행기표도 회사에서 끊어줬기 때문에 아까울 비행깃값도 없었다. 그저 내 자취방에서 성큼 밖으로 나왔더니 이스탄불이더라, 정도의 가벼운 기분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음식물 쓰레기가 있는 오른쪽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동네 같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이었다. 충동적인 결정으로 인한 걸음에 주변의 풍경은 점점 바뀌었다. 트램과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길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조건물과 골목들이 나타났다. 종아리에 힘이 붙고 몸이 데워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었다.


겨울 동안 정신없이 추위와 싸우며 공사장에서 일을 끝내고 보니, 여행을 시작할 땐 완연한 봄이었다. 뭔가 커다란 것이 몸에 남아있다가 휙 빠져버리고 가볍고 나른한 기분만 남았는데, 그것이 커다란 추억이 지나갔기 때문인지 아니면 차가운 계절이 지나갔기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할아버지와, 자기들끼리 공을 가지고 신나게 놀다가 낯선 동양인을 보고 경계와 호기심을 동시에 보이며 공놀이를 멈춘 꼬마들. 그런 풍경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구경하며 언덕을 오르다 보니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모스크와 마주쳤다.

언덕의 정상에는 모스크가 있었다. 모스크의 이름은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였지만 내게는 그저 '높은 곳의 커다란 모스크'였다. 나는 7년 전의 여행에서 이스탄불을 돌아다니던 내내 저 멀리 높은 언덕 위에서 항상 우리를 내려다보던 거대한 모스크의 존재를 기억했다. 너무나 유명한 아야 소피아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만 보느라 별로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높은 곳의 커다란 모스크'.


쉴레이마니예.. 쉴레이마니.. 쉴레이만 대제.. 나는 이름을 기억해보려 몇 번 노력을 해봤지만 역시 입에 붙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고유명사에 약했다. 약했다기보다,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것이 그런 이름을 가져야 하는 이유. 쉴레이마니예 모스크가 하필이면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여야 하는 이유. 그것을 지으라고 명령한 술탄의 이름이 쉴레이만이 아니라 '메흐메트'였다면, 그래서 이 모스크의 이름이 메흐메트 어쩌고 모스크였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달랐을까.


그런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삶에서 별 의미 없이 나를 스쳐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나는 영화를 보아도 영화감독들을 기억하지 않았고, 소설을 보더라도 소설가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같은 과의 학생들이 다 알던 '김승옥'이라는 이름을 안 것도 대학교 2학년이 한참 지나서였다.


"평화 시장 앞에서 줄지어 선 가로등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불이 켜지지 않았던, 도시의 어떤 가로등은 누군가의 이름이 '김승옥'이 아니라 '김승철'이라든지 심지어 '조병석'이었다고 해도 여전히 꺼진대로였을 것이다. 변하지 않고 꺼져 있는 그 가로등은 여덟 번째가 아니라 아홉 번째였더라도(물론 첫 번째나 두 번째였다면 좀 다르겠지만)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의미가 갈라지지 않는 갈림길에서, 나는 수많은 이름들을 흘려보냈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남았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차갑고 축축한 공기의 어느 겨울날(그것은 오 년 전의 터키여행 때였다), 캐럴송 대신 하늘에서 울려 퍼지던 이슬람의 기도방송 소리, '에잔'을 기억했다. 이스탄불의 수많은 모스크들은 저마다 다른 '에잔'을 같은 시간에 제각기 틀었다. 덕분에 하늘은 수많은 새들이 일제히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니듯 요란한 기도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하늘로 날아오르던 기도소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하늘에서 눈처럼 아래로 내려오던 하나의 기도소리를 들었다. 저 높은 언덕 위에 금빛 조명으로 빛나는 높은 곳의 커다란 모스크가 하나 멀리 보였다. 저런 곳에도 모스크가 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저곳에 갈 일은 없겠지, 라고. 다리도 아프고, 일행도 있고, 새로운 도시로 떠나야 하니까.


아마도 그렇게 짧은 기억으로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그 높은 곳의 커다란 모스크는 몇 가지 우연과 시간을 넘어서 이렇게 내 앞에 불쑥 나타나게 되었다. 같은 장소를 다시 여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예전에 지나갔던 갈림길로 돌아와, 그때 가지 못했던 다른 길을 걸어보는 것.


접근성이 좋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코로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늘빛 돔의 웅장한 모스크는 텅 비어 있었다. 동굴처럼 조용한 회랑에는 나와, 혼자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여성 한 명이 있었다. 머리를 묶고 사진기를 멘 그녀는 발로 공간을 더듬듯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며 진지한 얼굴로 모스크를 탐색하고 있었다. 일행도 없이 혼자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마도 나처럼 현재와 과거가 끝없이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겠지.


그녀를 보고 어쩐지 처음부터 혼자였던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저 카메라의 메모리 가장 앞쪽에 찍혀 있을 어떤 사람. 때로는 그런 사람과도 떨어져 지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항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고, 출국 수속을 위한 줄 앞에서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고, 비행기 좌석에 앉아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그리고 비행기가 중력을 거스르며 훌쩍 떠오르면, 아득해지는 찰나의 현기증과 함께 잠깐이나마 그 사람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하얀 구름을 가르는 비행기 날개를 멍하니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나는 모스크의 내부를 통과해 다른 문으로 나왔다. 기억에 남은 건 실내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고 밟았던 돌문턱의, 얇은 양말 너머로 전해져오던 그 유난히 시원한 냉기 하나뿐. 날씨가 슬슬 더워지긴 하는 모양이었다.


싱그러운 정원을 가로질러 모스크의 문을 나서자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손님이 없이 문만 열어놓은 기념품 가게가 있는 길을 따라 터벅터벅 내려오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란 이름을 기억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일부러 외우려고 해도 입에 익지 않던 이름이었는데. 이름이란 이런 식으로 기억하게 되는 걸까.

언덕을 내려가는 길의 담벼락엔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내 신발 바닥에 닿는 보도블록과 내 손에 닿는 벽, 내 눈에 닿는 햇빛. 더 이상 그것들이 비둘기색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즐거웠다. 한국에서의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종종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지중해의 햇빛을 듬뿍 받아 하얗게 빛나는 회칠한 담벼락과 집들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누비고 다니는 마리오의 모습. 그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한가로운 이미지였다. 나는 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그 이미지의 실체를 볼을 꼬집어보듯 손으로 만져 보았다. 거칠거칠하고 낡은 담벼락은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 같아서, 만약 손을 비틀어 꾹 짠다면 그동안 엿들었던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짜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폐가가 된 목조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터키에 와서 유난히 많이 마주치는 것 중 하나가 창문이 없이 썩어가는 목조건물이었다. 유리창문이 없어진 것은 건물이 죽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표라고 나는 생각했다. 의지로 막을 수 없는 바깥바람이 휑휑 드나드는 실내(어쩌면 실외). 그곳에 더 이상 삶은 없었다. 그런 것들이 삶 사이에 끼어 있었다. 수리될 기미도, 그렇다고 철거할 기미도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체란 곧 손해이다. 아무런 이득을 창출해내지 못하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며 썩어가는 목조 건물들은 지금도 누군가 활발하게 살아가는 생기 있는 건물 옆에 마른 해골(두 개의 구멍, 가지런한 이처럼 내려진 은색 셔터)처럼 붙어 있었다. 그런 것은 내게 든든한 감정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세상엔 여전히 잉여로운 것들을 위한 틈이 있구나, 하고. 그래, 존재는 손해가 아니다. 아직은.

걷고 걸어서 이스탄불 대학 앞까지 도착했을 때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아침이라기에는 늦었고, 점심이라기엔 일렀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 보려 했던 대학은 입구의 경비에 의해 바로 저지당했다. 아쉽긴 했지만 시도라도 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예전 여행과 달리 나는 조금 더 대담해져 있었다. 망설이기만 하다가 안 될 거야, 하고 먼발치서 그냥 발걸음을 돌리던 과거와는 달랐다. 예전에는 모스크 하나를 들어가더라도 일반인이 들어가도 되나 안 되나 입구에서 고민만 열심히 했었다. 혼자서 여행하는 지금은 걸릴 것도,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 시도가 막히더라도, 적어도 지도에 '물음표'는 남지 않을 것이다. 외부인은 출입 금지, 라는 대답을 들은 후에는 신기하게도 내부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여우와 신 포도'. 우화는 언제나 돌고 돈다.

아침 겸 점심식사를 위해 찾은 곳은 Boris'in Yeri라는 유제품 전문 가게였다. 백종원이 천상의 맛이라고 표현한 '카이막'이 있다는 바로 그곳. 이곳의 카이막을 먹는 것은 함께 공사장에서 일했던 알바생 U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공사장 근처의 식당에서 카이막을 함께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보니, U의 버킷리스트는 나의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U는 지금도 여전히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이제는 내 것이 되어버린 소원, 혼자서 이루게 되어버렸다.


다행히 가게의 문은 열려 있었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이곳에 오기까지, 나는 셔터가 닫힌 수많은 가게들을 지났다. 옷집도, 기념품 가게도, 레스토랑도, 모두 닫히고 드문드문 문을 연 것은 이런 동네 가게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먹어보고 싶었던 가게가 문을 닫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가게는 유제품과 꿀, 그리고 간단한 디저트를 파는 곳이었지만, 인상으로 보자면 마치 작고 오래된 동네 이발소 같았다.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깐깐한 표정으로 그럴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코로나 때문에 현재 터키 정부에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고 포장 주문만 가능하도록 제한하고 있었다. 거기다 해가 뜬 시간 동안 식당에서 대놓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라마단 기간까지 겹친지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충 길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먹기로 하고는, 카이막과 꿀을 주문했다. 할아버지는 선심을 쓰는 듯 카운터를 뒤적거려 반쯤 잘린 빵 한 덩어리를 함께 비닐에 넣어 내게 건네줬다.

힘들게 구한 도시락을 소중히 손에 들고, 나는 앉아서 먹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저 공터가 있을 것 같은 방향을 느낌에만 의존해서 걸었더니 작은 공원이 나왔다. 공원에는 간단히 음료수와 과자 같은 것을 파는 매점 겸 카페가 함께 딸려 있었다. 장사를 접었는지 대부분의 의자를 탁자 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매점에서 환타를 한 캔 구입한 나는, 문을 닫았지만 문은 열려 있는 카페로 들어가 카운터의 남자에게 혹시 여기서 식사를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손님 없이 TV만 멍하니 보고 있던 그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이제 막 시작된 라마단은 앞으로 한 달은 지속될 것이었고, 코로나는 여전히 종식될 기미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의 여행 기간 동안 계속 벌어질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내 돈을 주고 산 음식을 눈치를 보며 숨어서 먹을 곳을 발품을 팔아 찾아다녀야 하는 상황.


나는 간신히 마련한 안식처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탁자에 늘어놓고 바라보았다. 한 가지 긍정적인 사실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누추한 먹거리들이 한국에 있을 수많은 사람들이 터키에서 가장 맛보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음식이라는 것이었다. 카이막. 물소의 젖으로 만든, 버터의 고소함과 생크림의 신선함을 간직했다는 무척이나 농후한 크림. 천상의 맛이라더니 도대체 어떤 맛일지. 나는 일단 주인 할아버지가 무심한 듯 챙겨준 반쪼가리 에크멕 빵을 조금 뜯어 맛보았다. 딱딱하지 않고 바삭하고 쫄깃한 빵가죽에, 보들보들한 속살, 그리고 심심하지 않게 짭짤한 소금의 맛. 대충 남은 빵 가져가라, 라는 느낌으로 받은 빵이 터키에서 먹어 본 가장 맛있는 에크멕 빵이라니. 살짝 감동받은 나는 카이막을 듬뿍 떠서 찢어낸 빵 위에 놓고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진한 색깔의 꿀을 몇 번 끼얹은 다음 그 모든 것을 입에 넣었다.


천상의 맛, 일까. 조금 달랐다. 내가 생각한 것은 천상으로 가는 '다리'의 맛. 무척 맛있는 빵과, 무척 맛있는 꿀이 있는데, 그 사이를 건너가게 해주는 아주 근사한 다리. 다리가 너무나 근사한 나머지 다리를 건너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오직 다리를 건너는 동안의 그 기억만이 선명하게 남는 그런 여행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카이막 자체의 맛은 얼른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입에 넣은 즉시 퍼지는 빵의 고소함과 꿀의 단단한 달콤함은 이후에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카이막의 크리미하고 농후한 맛의 파도에 표류하듯이 목구멍 너머로 떠밀려가버리고, 남는 것은 오로지 카이막의 의미심장한 메아리뿐.


나는 모든 근심 걱정을 잠깐 잊고 즐겁게 빵과 꿀과 카이막을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먹었다. 꽤나 기대를 하고 왔던 음식이었는데, 그 기대를 충족하고도 남았다. '최고의 요리'라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최고의 간식'이라고 하기엔 완벽했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 3~4시경 배가 촐촐할 때 내 컴퓨터 옆에 한 그릇의 에크맥과 꿀, 그리고 카이막이 있다면 분명 누구보다 행복하리라.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적당히 산책을 하다가, 주변이 뭔가 부산스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싶었더니 어느새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인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7년이라면 그리 오래전이 아닐 텐데도, 이곳은 내가 기억했던 과거의 모습과 전혀 달라 보였다.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나는 뭔가 메마른 기분을 느꼈다. 이 거대한 석재 구조물이 원래는 이집트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스탄불(당시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와 세워둔 것이라는 배경지식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굉장히 지루해진 감상법이었다. 이 돌덩이는 당연하게도, 과거의 누군가가 뭔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었고, 그것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옮겨졌는지를 안다고 해서 내가 이 돌덩이와 감응하는 방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런 종류의 '의식', 그러니까 유적이나 기념물을 마주하고, 그것의 정보를 알고, 새삼스럽게 다시 보고 지나가는 그 '의식'을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정보가 더해진 것으로 나는 그 돌덩이와 무언가 '관계'를 맺었다고 '착각'해버리고는 잠시 입을 헤 벌리고 우러러보다가, 사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이 그저 미끄러지듯 지나칠 뿐인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내가 오늘 아침에 마주친, 까마귀가 쪼아 먹던 음식 쓰레기 봉지보다 '내게' 의미 있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돌덩이를 둘러보며 애써 감응하려던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혀가 말라버린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달래보려고 향한 곳은 아야 소피아 모스크였다. 7년 전 박물관이었던 이곳은 최근에 에르도안 대통령에 의해서 이슬람 사원으로 기능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예배가 한창이었다. 청아한 노래 같은 기도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홀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무슬림인 사람들은 예배를 보는 앞쪽에 있었고, 관광객들은 그들의 예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함인지 입구에 가까운 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나는 관광객들의 틈에 섞여 서성이다가, 슬며시 예배를 보는 앞쪽으로 걸어가 무슬림들의 사이에 풀썩 앉았다. 푹신한 카펫 위에 앉으니 시야가 달리 보였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관광객이 아니면,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나는. 그렇다고 정말로 그들의 일상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명소들을 구경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근사한 곳에서 잠을 자고, 신기한 것을 구입하고. 그런 것들이 아니면 무엇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믿지 않는 신의 성소를 앞에 두고, 나는 공사장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무슬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땀을 흘리며 일을 하다가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널판지든 뭐든 바닥에 깔고 메카가 있는 방향으로 여러 번 절을 했다. 꼭 일할 시간만 되면 절을 하러 간다고 농담 삼아 말하기는 했지만, 가장 장난기 많은 제밀 아저씨조차도 예배를 볼 땐 누구보다 진지했다. 주워들은 터키어로 간신히 그들과 몇 마디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그들과 작별하고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이미 주변의 모든 것이 낯익고 익숙해져 있었다. 건물도, 음식도, 터키 사람들도. 그러나 내가 속한 일상인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상한 여행이었다. 그런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아야 소피아 모스크를 나오자 문득 중국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중국 음식을 떠올리자 입에 침이 고였고, 지난 6개월간 전혀 먹어보지 못했던 중국 음식의 맛이 입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중국 음식을 먹는 감동은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 누리려고 했었는데, 오늘의 이 욕구를 이겨내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술탄 아흐멧 광장 한가운데서 뒤통수로는 햇빛을 받으며, 이스탄불에 있는 중국 음식점을 검색했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식당은 터키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지배인처럼 보이는 중국 아주머니도 한 명 있었는데 어쩌면 단골손님인 것 같기도 했다. 해산물 국물이 있는 면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먹고 싶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대신 야끼소바와 비슷한 쇠고기 볶음면을 주문했다. 좀 텁텁하고 미끌미끌하게 기름진 탄 맛의 국수가 나왔지만, 무척 반가운 맛이었다. 마지막 피망 한 조각까지 소중하게 먹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한 뒤 일단 숙소로 돌아가 조금 쉬기로 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더니 볼거리도 체력도 꽤 소진되어 있었다. 돌아가는 길의 이스탄불은 그래도 조금 밝아 보였다. 문을 연 가게의 야외 테이블엔 언뜻언뜻 사람들이 앉아 느긋하게 식사와 수다를 즐기는 모습들도 보였다.

오후의 여행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채 나는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복도의 벽에는 지금의 이스탄불보다 더 이스탄불 같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과 멀리 보이는 모스크의 실루엣.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런 풍경을 보게 되길 바라며, 나는 알람도 없이 잠을 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자연스럽게 잠에서 깼을 때 창밖의 햇살이 제법 그윽해져 있었다. 잠이 덜 깬 나는 잠깐 지금 깨어난 침대가 한창 공사일을 하던 랍세키의 여관방의 침대가 아닌가 착각했다. 휴일인가? 출근 시간을 놓친 건가? 아니, 오늘은 야간조 출근일지도..


피곤한 상태에서의 낮잠은 종종 시간과 공간감을 꼬아버리곤 했다. 그럴 때 보통은 철렁, 하는 마음이 들었다. 놓쳐선 안 될 것을 놓쳐버린 기분. 나만 남겨두고 무언가 중요한 것이 휙 지나가버린 느낌.


곧 정신을 차린 나는 여기는 이스탄불이고, 계약 기간이 끝나고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다 끝났고 이제 즐거운 일만 남았었지. 나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기대했던 것처럼 붉은 노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해 질 녘의 풍경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의 아늑한 일상의 색깔과 냄새. 그런 것들은 절로 유년시절의 한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학교든 컴퓨터 학원이든 그런 것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집마다 창문으로 흘러나오던 서로 다른 가정의 저녁밥 냄새. 조금 서늘해진 아스팔트 길과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해진 전봇대의 전깃줄. 아직까지 하늘에 남아 있는 빛 아래로 언제 켜졌는지 모를 가로등 불빛. 동네 서점 앞을 우르르 몰려 지나는 교복들.


갈라타 다리를 건너며 나는 지금 땅으로 내려앉고 있는 이 분위기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타인의 일상이다. 무척 아늑하고 부드럽지만, 내가 섞여들어갈 수 없는 온화함. 나는 내 실루엣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까만 머리색이 더 진해지는 것 같았다.

다리 위에선 역시 낚시가 한창이었다. 육고기를 사랑하는 터키 사람들이지만 알게 모르게 생선도 은근히 사랑받는 음식이다. 공사장에서 일할 때도 배를 기다리면서 틈만 나면 줄 하나만으로 낚시를 하는 인부가 있는가 하면, 겔리볼루나 차나칼레처럼 바다가 접한 곳이라면 언제든 해 질 녘에 느긋하게 낚시를 하는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무엇이 잡히는지, 그걸로 뭘 해 먹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리를 건넌 뒤에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는데도 이미 대부분의 상점들이 셔터를 내린 상태였다. 오후에는 별다른 일정 없이 근사한 저녁을 제대로 먹고 싶었는데 근사하긴커녕 뭔가 먹을 수 있는 걸 찾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갈라타 탑 근처의 언덕길을 굽이굽이 오르며, 핸드폰을 동원해서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가는 곳마다 셔터는 내려가 있었고 불빛은 없었다. 이스탄불은 또다시 내 눈앞에서 닫혀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어느 골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인터넷을 보고 찾아왔지만 굳게 닫혀 있던 레스토랑 건물의 옆이었다. 또 허탕을 쳤다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리던 중이었다. 지나치다가 무심코 돌아본 골목에는 나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래된 스산함 같은 것. 내가 지나온 자리엔 수많은 골목이 있었고, 폐허가 된 풍경(내가 주로 매료되곤 하던)도 많았다. 그러나 이 골목처럼 나를 잡아 끈 곳은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골목의 안으로 들어갔다. 해가 넘어간 후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저녁이었다. 4~5층 정도 되는 두 건물 사이에 좁고 깊은 공간이 있었다. 어디론가 통하지 않고 그저 막혀 있는 골목이었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아 밖의 길보다는 어두웠지만 하늘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창백한 빛 때문에 그리 어둡지만도 않았다. 골목에 발을 들이자 거리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고요해졌다. 아무도 없는 골목은 마치 동굴 같았다. 머리 위에서는 구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높은 곳의 창문 근처에 비둘기들이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마리가 푸드득 거리며 날아 좁은 하늘을 빙 돌다 반대편 창틀에 앉았다. 깃털과 함께 날갯짓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내려왔다.


이곳엔 비밀이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역광으로 까만 실루엣만 보이는 비둘기들은 내가 이 골목에 발을 들이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이 골목이 숨기고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골목의 더 깊은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끝에 닿지 않도록 충분히 느린 속도로.


나는 이 골목에 무엇이 있는지 입구 쪽부터 하나씩 살펴보았다. 일단 노란색으로 점멸하는 경보등. 그것은 골목 입구에 가까운 문에 붙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경보등의 빛은 골목의 밝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면 거기에 깜빡이는 빛이 있다는 사실도 금방 잊게 될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나는 그 경보등의 전구를 지나치는 것과 동시에 금방 잊어버렸다.


다음으로 본 것은 낙서들이었다. 그래피티라고 하기에는 조잡한 낙서들.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얼굴과 해인지 외계인인지 모를 새침한 얼굴, 웃는 개. 그리고 글자들. TRUST, CİHAT(지하드), 187, joKER, WHY... 서로 다른 글씨체의 낙서들을 보며, 나는 왠지 한 사람이 오랫동안 드나들며 낙서를 하나씩 늘려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공간을 즐겨 찾는 사람은 아마도 한 명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이었다.


누구도 이용하지 않을 것 같은 철제 비상계단, 잠망경처럼 벽을 뚫고 튀어나온 환기통, 유리 없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방과 거기에 세워진 마네킹 같은 것들을 보다가, 내가 왜 이 골목에 끌렸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함'이란 이름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는 내가 오래전 쓰려고 했다가 결국 쓰지 못했던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함은 늙은 남자였다. 그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한 공터에 있는 낡은 벤치에서 오랫동안 지내고 있었다. 그는 무해했지만 그만큼이나 무의미한 존재였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 공터의 벤치에 가만히 앉아 지냈고, 특정한 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함은 있었다. 누군가 그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함은, 거기에 있는 사람.


나는 함이 지내는 그 공간을 꾸미기 위해 이것저것 설정을 만들어 봤었다. 건반이 하나씩 하나씩 고장 나는 낡은 피아노를 둔 적도 있었고,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벽과 나선형으로 생긴 철제 비상계단을 둔 적도 있었다. 함은 건반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럴싸하게 피아노를 치기도 했고, 철제 비상계단을 보며 그렇게 생긴 계단으로 황급히 뛰어 내려가는 어떤 여자와, 그녀에게 손이 잡힌 채 엉거주춤하게 딸려오는 어떤 남자가 나오는 영화를 추억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 공터에서 농구를 하는 무리가 생기기도 했고, 인터뷰하기 위해 왔다고 거짓말을 한 남자가 함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공터를 꾸며보았지만 어떤 것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너무 밝은 분위기거나, 사물이 재미가 없거나, 너무 사람이 많거나 했다. 모두 '이야기'로 꾸려 나가기엔 단편적인 아이디어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소설을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함이 지내는 상상 속의 공터는 정말로 '공터'로 남게 되었다.


골목의 안쪽까지 걸어가는 동안,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져갔다. 나는 이 골목이야말로 함이 지냈을 법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떠올리려 노력을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공간이 이스탄불의 골목길을 걷다가 현실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만나본 적 없는 낯익은 사람을 알아본 것처럼, 나도 모르게 이 골목을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췄던 것이었다.


점점 깊이 걸어 들어갈수록, 나는 골목의 끝 막다른 벽에 존재하는 하얀 형상의 존재감을 점점 느끼고 있었다. 골목의 끝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그것에 시선을 돌린 채 주변의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걸었다. 화살표를 따라 순서대로 차근차근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골목의 끝에 도착하자,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깃발 같기도, 사람 같기도 한 형체였다.

나는 닫힌 셔터 위에 그려진 하얀 사람의 형체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두 팔, 그리고 그 팔에 마치 날개처럼 달린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찢어진 망토 같은 장식을 보았다. 아무런 이목구비도 없이 그저 비상구 그림처럼 동그란 모양의 머리였지만 나는 그 형상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하늘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치려는, 천사.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골목의 가장 깊은 곳에 그려져 있던 것은 천사였다.


나는 이 그림이, 이 골목에서 가장 마지막에 그려진 낙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낙서들, 고민과, 냉소와, 증오, 불신, 해학, 그런 것들 이후에 마지막으로 천사는 그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이후로, 그 사람은 더 이상 이 골목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아무도 그 사람을 모를 것이다. 이야기는 끝나 있었다. 남은 것은 지상에 두고 간 허물 같은 고요함.


나는 하얀 천사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많이 어두워지긴 했지만 하늘엔 여전히 희미하고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우렁찬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에잔'이었다.


나는 이슬람교에도 천사가 있다는 사실을 얼핏 떠올렸다. 이미 하늘로 올라가버린 누군가의 천사는 어쩌면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지도 몰랐다.

골목을 나온 이후로 나는 갈라타탑 근처의 좁은 상점가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이미 식당에 대한 기대는 접은 상태였다.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배가 그리 고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골목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터키에 온 이후로 마음이 가장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동안 이어졌던 공사 작업의 떠들썩한 나날에서 갑자기 변해버린 조용한 일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같이 이야기하다 이제 사라져버린 동료들, 라마단과 코로나로 인해 닫힌 가게들..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던 그런 것들이 이제 차분히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층 포근해진 마음으로 상점가 근처에 불 켜진 가정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낡은 창틀의 건물과 옆에 붙은 작은 골목. 다섯에서 여섯 살 정도였던 내가 살던 집과 비슷했다. 골목을 통해 부엌으로 숨어든 까만 도둑고양이가 저녁으로 굽고 있던 새우를 훔쳐 가서, 안타까워 발을 구르던 엄마의 기억.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젊었겠지. 추억을 아련하게 되새기고 있으려니 창문에 사람의 실루엣이 슬쩍 나타나는 것이 보여 얼른 자리를 피했다. 안에서 봤으면 좀 무서웠겠구나, 하면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사이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제 언덕을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 내 눈에 문득 들어온 것은 불 켜진 카페였다. 비탈길을 따라 반지하처럼 파묻힌 카페 앞엔 A자 모양으로 선 메뉴 입간판이 있었다. 여러 메뉴들 사이에 마카르나(국수)라는 단어가 얼른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냉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닌 밤중에 별안간 출현한 동양인의 모습에 가게 안의 남자(그들은 모두 손님은 아닌 것 같았다)들은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가게 안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잠시 자기들끼리 뭔가 이야기를 하더니, 가능하다고, 들어오라고 답했다. 가능하다. 들어와라. 무척 반가운 말이었다.


그들은 나를 구석진 곳에 숨겨진 작은방으로 안내한 뒤 커튼을 쳤다. 아마도 코로나로 인한 규정 때문에 가게 안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이면 안 되는 것 같았다. 포장 판매만 가능하다고 거절하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휘황찬란하게 불을 켜놓고 야외 테라스와 실내까지 사람이 그득하게 모여 식사를 하는 가게도 있어서 도무지 정확한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장사를 하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럴 땐 그냥 그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힘겹게 발견한 가게가 실내 식사가 가능하고, 거기다가 파스타를 팔기까지 하다니. 밤늦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문한 것은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와 스프라이트 한 캔. 식사에 스프라이트를 곁들이는 건 대학교 1학년 시절 처음 친구와 했던 이탈리아 여행에서부터 생긴 오래된 습관이었다. 왜 하필 스프라이트였을까. 나는 물방울이 맺힌 초록색 캔을 보며 고민했다. 이유는 딱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나온 파스타는 토마토의 시큼한 맛보다는 한데 섞여 눅진하게 가라앉은 해물의 맛이 그윽하게 느껴지는 스타일이었다. 맛있는 파스타를 찾기가 쉽지 않은 터키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맛이었다. 파스타는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했고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빨판 가득 감칠맛 나는 소스를 머금은 부드러운 문어 다리를 기분 좋게 씹었다. 늦은 밤, 오랫동안 거리를 헤맨 내게 무척이나 위안이 되는 맛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카페를 나와 숙소를 향해 걸었다. 밤의 이스탄불은 여전히 어둡고 조용했다. 모든 셔터는 닫혀 있었고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가로등은 닫힌 건물과 도로를 공허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첫날인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거리가 그렇게 비어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차도 없었지만 뭔가 관광지답게 떠들썩하고 요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 쓰기 좋은 골목을 하나 찾아서일까, 아니면 따뜻한 파스타로 배를 채워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그런 것일까.


단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던 내 느낌은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확신이 되었다. 거리엔 무언가 있었다. 소리는 없었지만 시끄러웠고, 전기도 없었지만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그래피티의 존재를 깨달았다. 코로나로 인해 닫혀버린 가게들의 셔터 위에, 불 꺼진 시멘트 건물의 벽에, 그것들이 있었다. 그래피티는 그저 한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 다니는 모든 곳에 있었다. 감은 눈꺼풀 위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아이섀도처럼, 그래피티는 문 닫은 가게들이 내려버린 셔터 위에 알록달록하게 빛나고 있었다.


닫혀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볼 수 있는 것. 눈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스탄불에는 여전히 볼거리가 많았다. 나는 숙소로 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그래피티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걸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고 마음에 드는 것은 LEO라는 글자의 그래피티였다.


'LEO'는 이스탄불의 골목 곳곳에 있었다. 갈라타 다리 근처의 건물에도, 숙소 바로 근처 가게의 셔터 위에도. '그래피티'하면 바로 생각나는 풍선같이 동글동글한 글자나 마구 휘갈긴 와일드 스타일이 아니라, 선명하게 각진 LEO라는 알파벳은 세련되고 정교하게 꾸며져 무척이나 또렷하고 예뻤다. 수많은 LEO들 중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하늘과 구름의 색으로 채워진 채 별이 박혀 반짝반짝 빛나는 LEO였다. 주변의 그래피티와는 격이 달라 보이는 퀄리티였다. 나는 LEO라는 그 이름을 기억하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하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서, 낮잠을 거하게 잔 것치고는 꽤나 긴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엔 아직도 그 골목에서 천사 모양의 낙서를 보며 느꼈던 감정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문득 즐거운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한 번씩만 그런 골목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내일의 여행에 대한 기대와 함께 나는 금방 잠들어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