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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0. 2018

[소설] 우주만화

'사랑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이탈로 칼비노



학교 도서관을 천천히 훑으며 돌아다니다보면, 전혀 의외의 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책과의 '인연'이 있다. 내가 그 작가의 이름을 제대로 모르더라도 표지,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떤 운명적 동질감.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책을 뽑아 표지를 보고, 첫장의 몇 줄을 슬쩍 읽은 다음, 다시 책장에 꽂으며 머릿속에 새겨둔다. 언젠가 한가해지면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그리고 다음 번에 잊지 않고 그 책을 다시 찾을 땐, 따로 위치를 검색하지 않아도 발이 그곳으로 데려다준다. 그렇게 되기까지 며칠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인기 없는 그 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나는 그 책을 다시 뽑는다. 오래 기다렸네. 나는 그렇게 하루키라는 작가와 <태엽갑는 새>를 처음 만났고, 그리고 이렇게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를 만나게 되었다(처음 제목을 기억하던 날 나는 그 책의 작가가 이탈로 칼비노라는 것을 몰랐다).  


가벼워보이는 제목과는 다르게 쉽지 않은 책이었고, <반쪼가리 자작>을 읽고 느꼈던 이탈로 칼비노에 대한 이미지(따스한 우화적 작가)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때문에 완독했을때의 카타르시스는 과연 내 '인생 책' 리스트로 직행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로써 '인생 책'은 두 권이 되었다. 내가 소설로 추구하려던 어떤 궁극적인 것을 이탈로 칼비노가 정말 근사하게 이미 해버린 그런 느낌을 받으며, 그 다음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정신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물론 즐겁기도 하다. 넘어설 수 있을까.



크프우프크(Qfwfq)가 프리실라를 사랑한다고 말하기까지 동원되는 그 '모든 것'


'사랑한다'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설명이 필요할까. 레이먼드 카버라면 꽤 근사한 한 문장으로 그것을 표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비노는 그런 '비약'은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개체의 '실존'과 두 개체의 '다름', 그들이 존재해야할 '공간', '사랑'이라는 욕망의 생물학적 근거, '사랑'을 하기 위해 보내는 '시간', 개체의 '탄생', 개체 이전의 '우주'의 탄생, 그리고 우주의 '이전' 까지, 정말 그 모든 것들을 동원한다. 


25 편의 각 장에서는 거의 항상 두 존재가 나온다. 모든 편의 '나'이자 주인공인 크프우프크와 를, 양치류 꽃, 오르그오니르오르니트오르, 우르술라 흐'크스, 프리실라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그녀(가끔 제 3의 남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칼비노가 이야기하는 것은 두 존재의 사랑이기도 하며, 두 존재가 존재 한다면 벌어지는 모든 관계성이기도 하다. 각 장은 하나의 과학적 모티브를 이용해서 그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극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근사하게' 설명해낸다. 


'근사하다'라는 것은 '문학적이다' 라는 말이다. 칼비노의 소설은 단순히 과학적 지식으로 그것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그 지식을 활용하면서도 하나의 우화적 비틀림과 꼬임으로 서사가 흘러가고, 서사는 독립적으로 인간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이고 궁극적인 고민과 해석이 있다. 한때 '과학'이 일종의 '철학'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었다고 믿어지는 현대에서, 다시금 그 구분을 고민하게 만든다. '과학'이란, 결국 '철학'의 한 갈래 중 굉장히 집요한 분파(헤게모니적인)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행위인 것이다. 



매력적인 25편의 집요한 상상력 


대체로 소설은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부인 세상들의 기억, 2부 은하계들을 좇아, 3부 바이오코미케. 그러나 그런 구분법이 아니더라도 '가독성'을 기준으로 친다면 앞의 3분의 1은 비교적 가볍고 서사와 우화성이 강한 재미난 이야기, 중반은 비슷하면서 조금 지루한 이야기의 연속(특히 행성들), 후반 3분의 1은 읽는 데 굉장한 힘이 드는 집요한 상상력(문맥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금방 이해불능의 영역으로 빠진다)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반의 이야기는 소재는 재밌지만 뻔한 경향이 있다. 중반은 삭막하고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지만 종종 촉촉하고 낭만적인 이야기가 나온다(특히 달 부분). 후반은 몇 번이고 앞문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문장의 흐름이지만 그 흐름을 제대로 탈 수 있다면 기가막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그 집요한 상상력이란!). 


그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몇 편이 있다.


<달의 거리>는 달이 지구와 너무 가까워 배 위에서 사다리 하나만 걸치면 달에 올라갈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크프우프크와 선장과 아내와 귀머거리 사촌 등이 탄 배가, 달이 뜨고 빛을 내는 해파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몽환적인 바다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달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달의 우유를 채취하는 풍경들. 마침내 멀어진 달과 그곳에 남은 선장의 아내. 이 장은 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몽환적이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이다. 


<나선형>은 그것을 스스로 관찰할 눈이 없으면서도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껍질을 만들어내는 조개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다. 눈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갖가지 색과 빛깔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색과 빛의 파장과 진동이 생물을 끊임없이 자극했기 때문에 '눈'이 생겼다는 발상. '아름다움'이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세상엔 그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위한 '눈'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생각할 여지가 많은 즐거운 상상이다. 그녀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스스로 만들어냈던 조개는 정작 그것을 볼 눈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자신을 아무런 한계 없이 인식하고 확장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의 상상력이 극대화된 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피, 바다>는 자신의 외부로 바다와 접촉하며 생명력을 얻던 세포적 존재가 이제는 내부에 그러한 접촉을 핏줄이라는 기관을 통해 반복하고 있다는 생물학적 지식을 모티브로 시작한다. 핏줄에 생명력을 가진 태초의 바다를 지니고 있는 다세포 생물들. 그리고 생명력의 바다가 내부로 들어간 세계에서 공허해진 외부. 이 이야기는 그런 외부적 서사가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장이다. 기본 서사는 한편의 로드무비이며 다분히 영화적이다. 그러나 그 내부에 흐르는 근원적 욕망. 타인의 피를 보고 싶어하는 폭력적 욕망의 정체는, 내 것이 아닌 다른 개체의 '바다'를 생명력 넘치는 내부에서 공허한 외부로 끄집어내버리고 싶은 생물적 적대 욕망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사랑하는 대상이 나와 다른 개체인 한. '그건 단지 외부, 메마르고 무의미한 외부의 무한한 파편에 불과했으며, 음울한 주말 교통사고 통계의 숫자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지식적 상상력이 종국에 급격히 현실의 일부분으로 떨어지는 그 중력!   


마지막 장인 <프리실라>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식적 배경과 함께 항상 우화적 꼬임으로 문학성을 놓치지 않았던 칼비노가 마지막 장에 들어서는 거의 여과없는 과학적 단어를 통해 발화를 하고 있다. 장의 앞에 항상 모티브가된 과학적 지식을 곁들이던 책의 구성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지식이 동원되었고, 장의 길이도 가장 길며, 모든 장을 통틀어 가장 따라잡기 힘든 문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여태껏 했던 이야기를 토대로 그의 거대한 우주적 상상 모험이 종착지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은 가장 중요하고도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실존의 문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결코 끝나지 않을 질문. 인류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되고 있는, 될 것이 분명한 마지막 과제.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인 크프우프크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는 물고기였고 공룡이었고 일종의 메아리였고 선원이었고 낙타였지만, 그토록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사실은 모든 것이자 최초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하나가 가진 가능성에 대한 필연적인 욕망, 그리고 분열을 통해 시작된 모든 존재의 이야기와,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비로소 '탄생'할 수 있었던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인 '나'. 그리고 '너'와의 만남과 끌림이 최초의 하나이던 기억의 끌림이면서 분열에의 동시적 욕망이라는 것. 


모든 존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이 없었다면 분열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실존문학의 대명사인 카뮈조차도 결국에 스스로가 지양했던 '비약'으로 빠지고 말았던 그 실존의 부조리한 공포에 대해, 칼비노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와 치열하게 대결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언제나 나를 괴롭히던 실존적 두려움이 처음으로 아주 약간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약간'이란 그의 말처럼 무와 대비되는 '모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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