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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7. 2018

[영화] 라라랜드

'마법'  

La La Land 2016 - 다미엔 차젤레

 



이전까지 내 인생 영화는 <인셉션>이었다. 팽이가 돌던 마지막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짠 하고 화면이 끊기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에야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정도로 압도적인 몰입력이었다. 7년 동안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인셉션> 정도의 충격은 주지 않았고(<Her>의 여운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리듬도, <버드맨>의 카메라도 굉장했지만), 최고의 영화를 말할 때 즐거운 지적 상상의 꼬리를 물게 만들었던 <인셉션> 이외의 영화를 말하게 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교내의 작은 영화관에서, 옆좌석에 겉옷을 올려 놓은 채, 두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사람들과 숨을 죽이고 <라라랜드>를 보는 동안, 이제 그 순위가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뮤지컬을 특히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로맨스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할 줄은 몰랐다.


그래. <라라랜드>는 최고의 영화였다. 적어도 나에겐.


3중 레이어   


음악은 언제나 옳다. 좋은 음악이 쓰인 영화는 좋다. 그러나 <라라랜드>를 감상함에 있어서 음악은 좀 더 특별한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라라랜드>의 음악엔 세 개의 레이어가 있다. 하나는 영화의 상식적이고 관습적인 레이어다. 배경음악이 원경에 깔려있는 경우다. 그것은 관객의 귀에 들리기로 약속된 음악이다. 극중 인물의 심리상태나 상황을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으로 흔히 쓰인다. 그러나 <라라랜드>에선 음악이 단지 원경에만 깔려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 음악은 언제라도 원경으로부터 탈출해서 극중 인물의 입으로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때문에 음악이 멀리서 들렸을 때, 관객(아마도 나)은 언제나 그것을 대비하고, 긴장하게 된다. 때로는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끝나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잔열처럼 한발자국 밖으로 물러나 조용히 깔리는 경우도 있다. 언제든 코앞까지 다가올 수 있다는 그 긴장감. 그걸 유지하는 것이 스윙 재즈의 묵직하면서 통통 튀는 베이스라니. 나는 영화관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손가락이, 그리고 무릎까지 올린 발이 쉴 새없이 까닥까닥거리는 것을 뒷자리에서 지켜보았다. 모두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초점을 넘나드는 음악에 이미 동화되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보통 영화관에서 음악이 좋다고 몸을 움직이거나 하진 않는다-아니면 사람이 적어서 그런가). 베이스의 워킹과 드럼의 리듬에 조종당하면서. 


두 번째 레이어는 인물들의 입으로 직접 부르는 노래다. 뮤지컬 영화니까 당연한 것이긴 한데, 안타깝게도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분명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들에겐 그저 '저 사람들이 갑자기 왜저래?'하는 정도의 놀라움과 불쾌함만을 가져다 준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잘 나가다가 누구 보라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가. 뭐, 이런 점은 장르니까 어쩔 수 없다(<레미제라블>을 보고 대사가 한 마디도 없다고 울분을 토하는...). 그건 제쳐두고, <라라랜드>는 오히려 거기서 더 나아가 '발칙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뮤지컬과 영화의 어색하기 마련인 그 이음새를, 오히려 더 선명한 터치와 뻔뻔스러운 연출을 사용함으로써,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물론 천문대 장면의 경우는 좀 너무 나간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하지만..). 음악이 두 번째 레이어에 침입할 때, 배우들의 연기엔 망설임이 없다. 그 뻔뻔함이 절정에 이른 것이 천문대장면 'A Lovely Night' 부분. 이건 일종의 '환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서사적으로 가능한 행동이 아니다), 뮤지컬 영화는 항상 이 부분에서 개연성을 '희생'하곤 하지만, <라라랜드>는 오히려 재치와 유머를 확보하는 데 그것을 이용한다. 순순히 수긍해줄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원경에서 계속 들어온 그 음악들이 영화의 리듬을 충분히 만들어냈고, 우리가 그 리듬에 모르는 사이에 탑승해 있었기 때문이다. 리듬에 올라탄 것은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주차장에서 차를 찾다가 탭댄스까지 출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쫄깃하게, 그 리듬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레이어는 <버드맨>에서 제대로 사용해 재미를 봤던 것인데, 근경에 깔린 음악이다. 즉, 서사를 진행하는 인물들이 아닌 다른 인물들이 멀지 않은 곳에 직접 등장해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라라랜드>는 음악 자체가 소재이기도 하니 더욱 적극적으로 이 레이어를 사용한다. 세바스찬이 참여하는 연주들, 재즈클럽에서 흑인들이 하는 연주들, 이것은 음악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영화가 아니라 콘서트 장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직접적인 즐거움을 주는 이 연주들이, 한편으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레이어를 보기 좋게 연결하는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이 세 번째 레이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배경음악과, 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 사이의 어색함을 지우고, 다층적인 차원으로 습격하는 음악의 홍수 속에서 <라라랜드>가 만드는 특유의 리듬(그리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실린 서사)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이 레이어는 '현실'이면서 '환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구분을 무화시킨다. 


물론 이것들은 <라라랜드>가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특징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 레이어를 다루는 솜씨다. 그것들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명확하게 구분되지도 않고, 때로는 동시에 관객들을 습격한다. 그것들은 적재적소에, 유머러스하게, 근사하게 사용된다. 현란한 삼중의 레이어의 향연은 때로는 절제함으로써 그 역할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시종일관 음악이 원경이든 근경이든 끊이지 않던 <라라랜드>도 종종 음악이 멈추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것은 분명 고의적이며 의미심장하다. 귀를 즐겁게 해주던 음악이 사라지고 별안간 관객들의 귀를 찢어버릴 듯 울리던, 연기나는 오븐의 경보음을 기억해보자. 그 먹먹함이 어떤 역할을 했을까. 


환상적인 환상


그렇다고 음악만이 있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치밀하고 감각적인 구성은 첫 장면부터 시작된다. 밀리는 차들의 행렬 사이에서 凸를 나눠가지며 스쳐 지나갔던 미아와 세바스찬. 그 사소한 순간에는 세바스찬이라는 캐릭터의 중요한 요소인 '경적 울리기'가 복선처럼 깔려 있었고, 인물의 소개가 세바스찬의 순서로 넘어오면서 되감기처럼 다시 사용되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게다가 이 짧은 '되감기'라는 것은 뒤에 나타날 거대하고 아찔한 '되감기'의 예고였으니... 


 


모든 서사는 이 장면으로 돌아왔을 때 그 시간과 무게 만큼이나 강한 충격이 되어 나를 강타했다. 모든 것이 단지 '가능성'이었을 수도 있다는 그 아찔함. 슬픈 것도 아니고, 단지 그 구성의 근사함만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콧등이 시큰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하필 이 장면으로 돌아가다니... 맙소사). 플래시백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방심한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는 도발적인 환상성. 그리고 그것의 의미. 


그리고 이 부유가 한참 이어졌다가, 그것이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되어, 또다시 원래의 현실로 돌아와 푸른 배경의 매끄러운 피아노 건반 위 세바스찬의 손가락 끝으로 떨어지는 그 아련하고 슬픈 중력. 이 영화가 마법이라고? 정말 마법이었다. 정말로. 


매력 매력 매력


속삭이는 듯 했다가 폭죽처럼 터지는 노래들.


신나는 노래를 따라가다보면 마지막에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떨어뜨리는 영상미 넘치는 풍경.


반짝이는 구름 위에 올라탄 듯한 창의적인 카메라 워크. 


적절하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음악으로 유기체처럼 연결되던 이 영화에 꼭 필요했던 계절 구성.


수많은 매력 중에서 단연 빛났던 것은 세바스찬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의 매력이었다. 완벽한 전통재즈주의자였던 그는 사실 극중에서 내키지 않는 연주에 끌려가서 건반을 두드리는 일이 많은데, 툴툴거리면서도 그때마다 보여주던 그의 은근히 즐기는 표정과 미소 같은 것(주머니에 손을 넣은 연주라든지..)은 '피아노 치는 남자'의 매력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수트 간지는 말할 것도 없다. 미아를 연기한 엠마 스톤의 리듬에 찰싹 달라 붙은 것 같은 몸짓도 마찬가지. 둘의 관계는 그러니까 <노다메 칸타빌레>의 노다메와 치아키, 그리고 <주토피아>의 주디와 닉, 그 사이의 어딘가와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만큼 이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인식할 수 있는 매력이 분야마다 한계치를 넘고, 그것이 다층적으로 들어오면 사람이 과부하에 걸리는 법이다. 영화를 보고 난 내 상태가 그랬다. 어느 누구도 크레딧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불도 안 들어왔다), 단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여운과 벅참이 가시지 않았다. 중반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동시에 나는 이 영화가 끝나지 않고 조금 더 지속되기를 보는 내내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꼭 마법에 걸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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