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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7. 2018

[영화] 클로저

'Hello stranger.'

Closer 2004 - 마이크 니콜스

 




낯익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인데, 유난히 익숙한 언굴들이 이렇게 주요인물로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네 사람을 둘러싼 사랑 이야기는 내게 괜스레 더 복잡해보였다.


그러니까, 내겐 이 이야기가 마치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저격수 영웅 바실리가 퇴역을 하고 영국에 가서 살고 있는데, <레옹>의 도움으로 과거의 아픔을 잊고 성장한 마틸다가 나타나자 불쑥 그녀와 사귀다가, 새 애인과 다시 헤어지고 요즘엔 사진을 좀 찍고 있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에게 끌리는 그런 이야기인 것처럼 보여서, 뭐랄까, 묘한 감흥이 들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는. (클라이브 오웬은 좀 낯설어서...) 


첫 장면이 신선해서 몰입하기 좋았다. 방금 비가 내린 듯한 상쾌한 도시, 젖은 아스팔트와 빗물이 여전히 맺힌 버스의 창문.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연히 벌어진 사고.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댄을 따라서 영국의 어느 거리를 걸어보는 것은 꽤나 실감나는 즐거움을 주었다. 적당한 날씨를 잘 잡았구나, 하는 느낌. 덕분에 쉽게 몰입했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몰입은 적절히 유지되었다. 


오랜만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화였다.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고, 서사와 갈등이 솔직했고, 마지막의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전 또한 의외로 묵직해서, 마음에 드는 식사를 적당히 배부른 상태에서 딱 끊은 것 같았다. 결국 누가 누구와 이어질까 궁금했지만, 결국 실은 누구도 누군가와 이어지지 않았다. 결론도 납득이 가능했다. 헤어진 두 사람과, 내키지 않은 결혼생활을 쭉 이어갈 두 사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났다. 만약 사랑이 '끌림'에 충실한 것이기만 한다면 결국 마지막엔 무엇이 남을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어떤 수칙과도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이끄는 곳은 결코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세계는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더군다나 네 사람 사이에서 화살표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더더욱(댄과 래리 사이의 화살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네 사람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다소 복잡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입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좀 전통적인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두 남자를 중심으로, 두 여자를 대상으로, 그녀들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수컷들의 싸움 구도다. 남녀 사이의 서사는 기본으로 하고, 댄과 래리 간의 갈등은 선명하고 비중있게 그려지지만, 앨리스와 안나 사이의 갈등이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명히 그녀들은 자신들끼리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장소를 이동하는 것은 언제나 두 남자들이었고, 두 여자들은 그들이 도착한 장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중심인물처럼 보였던 앨리스가 비중있게 나오는 것도 영화의 처음과 끝, 그정도였다. 그것은 매끄럽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유이한 아쉬움이었다.


다른 하나의 아쉬움은 툭툭 점프하는 시간 진행의 무심함이다. 서사가 강조된, 즉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주 관심사인 작품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인데, <클로저>는 꽤나 의도적으로 장면과 장면 사이를 러프하게 끊어버린다. 그 사이에 지나갔을 거라고 짐작되는 시간은 단지 옷과 헤어스타일 정도로 '암시'해버리고 지나가버린다. 이런 시도는 뭔가 '7년 후' 같은 글자를 시간을 들여 띄우는 것보다 훨씬 쿨해보일 순 있지만, 문제는 <클로저>란 영화는 그렇게 툭툭 띄어 버리기엔 여운이 있는 장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나 후반부에 서로의 관계와 상황, 감정이 꼬이고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에 그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대뜸 시간을 툭 뛰어넘어버리는 진행은 좀 다급하다는 인상도 들었다. 스타일이라고 치부하기엔 조금 안 맞는 옷을 입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여권과 공원과 이름에 대한 반전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진실'이란 근사하면서도 뻔한 주제를, 딱 적당한 무게로 영화에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댄과 래리가 '진실'이란 것을 추구하기 위해 나름대로 발버둥치던 그 행위들이, 오히려 어떤 '진실'로부터 그들을 멀어지게 만들어버렸으니, 아이러니란 언제나 묘한 매력이 있다. 반전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영화라 더욱 효과가 컸다. 뭐랄까, 낙차는 작지만 울림이 멀리까지 닿는 반전.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어쩐지 '안나'라는 책상다리 하나가 조금 짧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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