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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20. 2018

[영화] 숏버스

'오르가즘과 정전'

Shortbus 2006 - 존 카메론 미첼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보듬는 영화,

이 문장 하나로 이 영화는 설명이 가능할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 주로 등장하는 두 가지의 갈등 양상이 있다. 하나는 세상과의 편견과 싸우는 것. 다른 하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숏버스>는 아무래도 후자의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영화엔 외부사회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투쟁하는 지리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세계와 상관이 없는, 이미 그 취향이 인정된 작은 '숏버스'에서도 여전히 벌어지는 '나' 자신과의 새로운 갈등. <숏버스>는 좀 더 내밀한 세계의 이야기다. 


오르가즘, 구원


이미 마련된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 뒤엉켜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더 이상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영화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어떤 궁극의 상태, 즉 오르가즘이다. 오르가즘이란 마지막 문을 여는 열쇠이며 유일하게 추구해야할 진실이다. 그들의 삶이 겉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속되고, 지금으로도 충분히 행복해보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나 함께 있지만, 그 마지막 열쇠가 문을 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거짓이 된다. 오르가즘은 자신의 길이 정말로 맞는지 확인하는 유일한 진실이다. '나는 정말로 행복한가?' 뻔한 질문이긴 하지만, 이 질문을 어떤 상황, 어느 지점에서 던질 수 있는지가 고찰의 깊이를 증명한다. '숏버스'라는 공간에서 그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자살 영화를 찍는 제임스는 '삽입'에 도달할 수 없다.

성상담가인 소피아는 정작 자신의 남편과는 '절정'에 다다르지 못한다.

'오르가즘'을 느껴봤다고 주장하는 세브린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것을 갈구한다.


사실 그들은 숏버스에 다니면서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존재에 위안을 받으며 영화나 보면서 이정도면 그래도...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상태는 지속된다면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미해결의 상태다. 그들은 스스로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 오르가즘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정말 존재하기나 할까. 사람들이 착각하고 지어낸 상상속 단어는 아닐까. 


프로이트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에겐 여전히 '자기 검열'이 있다. 오르가즘을 느낌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검열을 이겨내야만 한다. 문제는 이 검열이란 존재 자체를 눈치채기 어려운 교묘한 장치라는 데 있다. 검열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저 위에 존재하는 '대전제'를 의심해야 한다. 마치 개미가 사람의 손가락을 인식하듯이. 


영화에서 이 대전제는 언제 드러날까. <숏버스>에는 가장 핵심적이고 의미심장한 사건이 있다. 바로 '정전'이다. 정전은 세계의 일반적인 법칙을 깨뜨리는 일이다. 일종의 무정부상태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두워진(그러나 포근한) 세계 속에서 촛불을 켜고 달라진 시각으로 서로를 본다. 제임스는 스토커가 자신과 제이미를 항상 지켜보던 그 창문에 서서 제이미를 바라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제나 함께'라는 대전제에서 살짝 비켜나서 서로를 본다. 그들은 여태껏 생각해본 적 없는 멀지 않는 '거리감'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대전제를 인식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기 위한 1차적 과정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이란 이성간에 일어나는 일'이라든지, '사랑이란 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든지(셋 혹은 하나도 가능할 수 있다). 대전제를 인식하고 의심하는 순간은 원래의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므로 파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말한다. '강탈과 폭력사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요할 필요는 없다. 인식의 정전이란 보지 못했던 진정한 것을 보게 될 포근한 어둠이자 새로운 빛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보듬는 포근한 미소)


이것은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인데,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러한 미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상처받은 경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미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들이 그토록 치열하고 힘겹게 싸웠던 문제들이, 그들이 지친듯이, 그러나 이제는 되었다는 듯이 눈에 보이도록 짓는 그 푸근한 미소에는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다정한 분위기의 '캠프파이어'에서, 우리는 그런 표정을 잠깐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문제는 '오르가즘'이라는 순간으로 인해 정말로 해결이 된 것일까? 


나는 <숏버스>의 인물 중에서 세브린에게 가장 공감을 많이 했는데, 그녀의 중요한 대사 때문이다. 


"끝나고 나면 슬퍼지나요?"

"그래."

"왜요?"

"시간이 멈추지 않아서. 

나 혼자도 아니고."


나는 이 말이 '나 혼자가 아님'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녀가 결국 친구를 사귀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위한 행진에 참여하며 노래를 따라 부름으로써 구원받지 않기를 원한다. '구원'이란 '구원 이후'를 생각하면 언제나 공허해질 뿐이다. 일종의 '현자타임'을 우리는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그들은 남은 생애 동안 항상 그 '포근한 미소'를 얼굴에 달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일까?(이것은 나의 편협한 심사인 것은 안다)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미소를 짓는 곳이 현실에도 있다. 나는 교회와 숏버스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곳이 아니면 치유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곳에서라도 순간적인 포근한 미소를 짓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이 파괴되어버릴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고, 우리는 일생을 노래만 부르며 살아갈 수도 없다. 구원이 '만족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나는 한평생 구원받지 않기를 원한다. 그 뒤에 따라오는 공허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어떤 지속적인 힘의 파장을 가질 수 있다면, 분명 의미없는 순간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의 연속성에 대해 <숏버스>가 더 할 수 있었던 말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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