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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24. 2018

[영화] 터널

'멈춰진 윤리의 행복한 살풀이'

Tunnel 2016 - 김성훈

 


소름을 돋게 한다


라는 말을 하루키는 <먼 북쪽>이란 책을 소개하며 말했다. 내용 상 크게 소름 돋을 일이 없었던 그 책이 일본인 하루키를 소름 돋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라는 '원전 사태'라는 특수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예술 작품에서 작품 그 자체에 의해 작품성이 판단되기 보다 그 배경적 사건이나 외부의 맥락에 의해 인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종종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 그 작품의 예술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럴 때 누구나 흔히 드는 의문이 있다. 그 특정한 사건이 없었어도 과연 그 작품은 좋은 작품일 수 있었을까? 그 특정한 사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 작품은 의미가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작품은 과연 하나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외부적인 사건을 빼고도 작품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 자체에 이미 모순이 있다. 외부적 사건은 이미 그 작품과 뗄 수 없는 작품의 분명한 일부이다. 그 질문을 만드는 직관, 즉 작품은 텍스트 그 자체로 독립적이어야한다, 는 습관적인 인식은 이제는 고리타분해진 '비평'적 사고가 여전히 사람들의 직관 속에 그림자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터널>이란 영화를 보며 누구나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그 특정한 사건이란 분명 '세월호 사건'을 말한다. 이 연상 작용은 관객들의 조건반사적인 연결이나 착각이 아니다. 영화는 다분히 세월호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고, 또 일부러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노골적으로 강조되는 주변인들의 사진 찍기 행위나, 구출 작전 도중 죽은 대원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사실 세월호 사건 이후의 모든 재난물은 그 사건의 영향력에서 자의적으로 벗어나기 힘들다. 모두가 (물론 창작자도)사건을 안다고 가정된 상황에서 비슷한 구조를 가진 서사들은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애써 모른척하며 사건으로부터 독립성을 주장하든지, 혹은 오히려 인정하고 정면돌파를 할 것인지(물론 아닌 척 하면서도 은근히 그렇게 읽히길 의도하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영화 <터널>은 후자다. 이 작품은 세월호 사건의 은유적인 풍자로 남길 자처했다. 터널이 무너진 사건의 발단과 구출과정의 전개, 그리고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직접적, 정치적인 갈등들까지 거의 모든 것이 그 사건에 대한 하나의 은유임이 분명해보인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은 구출되지 못했지만, 하정우(정수)는 구출되었다. <터널>이 외부적 사건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작품이란 것을 분명히하고,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작품이 유효할 수 있다는 것도 확실히 인정한 뒤에, 내가 영화 <터널>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 마지막에 관한 것이다. 그가 구출되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엇이 되었다.


다 꺼져 이 개새끼들아


오달수(대경)의(혹은 하정우의) 이 한마디를 위해, 이 영화는 만들어졌다. 영화의 장르는 '휘발성 사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언론, 정치인, 국민들의 정서 사이에는 풀리지 않는 딜레마들이 가득했다. 생명과 돈과 또다른 생명이 걸린 문제와, 국민들의 '목적을 알 수 없는' 관심, 사건에 대한 보도와 사건의 감정적 소비 사이의 애매한 경계, 무엇에 대한 것인지 불분명한 어떤 불신, 분노와 자조와 동정과 자책 사이를 정처없이 오가는 감정의 중심... 사람은 무언가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무엇이 옳은지 정해야 하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실히 해야 한다. 어딘가에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정의나 윤리를 견뎌내지 못한다. 설령 그런 것이 세계의 진짜 모습이라고 해도. 


때문에 필요한 것은 멈춰진 모형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해졌을 때, 그러니까 누가 순도 100%의 나쁜놈이고 착한 사람인지, 그리하여 그들이 어떤 식으로 대접을 받게 되는지가 명확히 정해졌을 때, 정의와 윤리는 멈춘다. 그것이 멈추면 우리는 안심한다. 멈춰진 모형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편하고 피곤했다. 이제 그들을 안심시켜줄 시원한 '사이다' 한 잔을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터널>에서 누가 착하고 나쁜지는 명백하다. 하정우는 100% 무고했고, 배두나는 절망적인 와중에도 자처해서 인부들에게 계란 후라이를 지져 나눠줄 정도로 열심이었으며(발파작업 공사에 꽤나 순순히 응하기도 했다), 오달수는 정의로웠고 희생적이었다(설계도의 잘못은 명백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장관과 기자와 설계업자, 기업인들의 잘못은 또한 명백하다. 풍자는 항상 허물과 딜레마가 없는 100%를 원한다. 잘잘못이 확실히 가려진 그런 가상세계에서만 그들은 행복한 살풀이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와중에 하정우는 살아 돌아왔다. 장관은 똥씹은 얼굴을 하고 퇴장했고, 오달수는 통쾌하게 한 방 먹였다. 하정수는 말끔해진 얼굴로 배두나가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무사히 터널을 빠져 나와서 나른한 듯이 웃음짓는다. 


나는 적어도 영화가 그들이 터널로 들어서는 바로 앞에서라도 멈추길 바랐다. 그리하여 터널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것이, 그렇게 쉽게(힘들었지만 어쨌든 종국에는 반드시) 극복될 수 있는 것처럼 메시지화 되지 않길 바랐다. 서사라는 무감정한 요소가 필연적으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메시지가, 그렇게 만족스럽게 멈춰버린 것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개인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터널을 빠져나가는 순간, 죽어서 돌아올 수 없는 두 사람이 이유 없이 문득 생각나며 찜찜했던 것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예측해보기도 했다. 


잘잘못으로는 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다. 왜 찜찜했을까. 모든 것이 명쾌해진 가상세계에서조차도 왜. 영화의 마지막에서 나는 문득 윤리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우리는 윤리에 익숙하고, 또 윤리에 예민할 수도 있지만, 윤리를 다루는 방식에는 언제나 서툴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 가지 사실 때문이다. 윤리는 결코 어디에 가만히 멈춰 있지 않는다. 








-인상적인 음식은 역시 개밥. 먹는 모습으로 유명한 하정우는 이제 개밥 먹방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너네는 간을 안 하는 구나'라는 대사는 내 혓바닥의 감각을 정말 직접적으로 자극했다. 먹어본 적도 없는데 왜 공감을 하는 거지?

 떨어지는 빗물에 씻어 먹는 계란후라이도 훌륭했다. 디테일이 좋았던 영화.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더니 스크린으로 보이는 모든 강아지들이 다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탱이는 종종 일인극처럼 진행되는 하정우의 훌륭한 보조역이었다. 


-구출과 관련한 여러 개연성들이 마지막 급박한 구출 상황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무너지는 건 조금 안타까웠다.  


-<킵>을 읽고 쓴 글에서 문학적 치유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치유의 기능에 얼핏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치유 되었는가? 무엇이? 


-오달수의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후진신이 가장 맘에 들었던 장면. 뭔가 전위적이다. 번쩍번쩍. 어떻게 그 장면에서 빛을 강조할 생각을 했을까.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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