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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20. 2018

[영화] 다른나라에서

'다른, 나라에서'

In another country 2011 - 홍상수




"여기 왠지 홍상수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곳인데?"


라는 말을 일상에서 종종 들었다. 그건 일종의 유행어 같은 말이었는데,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맞다맞다 공감을 했고,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홍상수 영화를 봐야지'라고 다짐했다. 그 말은 그 뒤로도 꽤 자주 들었고, 또 한 곳에서만 들은 것도 아니었다. 처음 들었을 때 그 느낌은 뭔가 좀 대중적이고 신파적인 느낌이란 어감을 줬다. 이런데서 소주도 먹고, 중얼중얼 이야기나 하고, 드라마 같이. 뭐 그런 느낌이었는데, 여러 번 들을수록 뭔가 일정한 문맥이 있었고, 그 장소들이 그려내는 풍경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드라마 같은 것과 좀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좀 신기한 경험이었다. 영화나 감독을 접하기 전에 분위기를 먼저 접하다니. 그래서 기억했을 것이다. '홍상수'란 어떤 고유명사를(작가, 감독, 고유명사에 약한 내가). 감독을 먼저 알고 영화를 보게 된 경우도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첫 영화니 감독보단 영화에 집중해서.


모국어와 외국어   


<다른나라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콩글리쉬(억양)'다. 이 영화엔 외국인을 만났을 때 나오는 한국인 특유의 수줍음이 잔뜩 드러나있다. 주인공(화자로 설정)인 안느는 프랑스인이다.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설정이다. 사실 이 영화는 너무나 한국적(언어와 공간)이어서, 주인공인 안느가 프랑스인으로 설정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할 정도다. 그녀는 마치 이식된 장기 같은 느낌으로 한국이란 배경에 뚝 떨어져있는데, 거기다 이 이질적인 인물을 배경과 조화시키려는 의도도 없어보인다. 예를들어 조금 더 유려한 영어 발음의 구사자라든가, 혹은 아예 프랑스어 통역자라든가(그의 애인이나 전주의 민속학교수라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체인 가게나 서구적 아이템도 없고, 하다못해 바다도 날씨가 구질구질할 때 촬영해서 우중충하다(푸른 바다는 만국공통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재미있게도, 많은 부분이 즉흥적으로 느껴지는 이 영화에서 이 특징들만큼은, 그러니까 이 터프함(거친 한국성)만은 굉장히 의도적으로 느껴진다. 즉 일부러, 그렇게 한국적인 서툰 영어발음을(그러나 의외로 명료한 어휘와 전달성), 그리고 관광지로서 거의 매력이 없을 것 같은 모항이라는 배경을 고집해서 사용한다. 그런 터프한 한국은 안느(라는 외국)에게 보여지기에 적절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즉 안느라는 외국인을 거의 날것의 모국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관객이 영화를 본다면, 그 특유의 수줍음을 함께 경험할 수밖에 없다. 아아 라이트 하우스? 웨얼? 아이 돈 노! '펜션 슈퍼 낚시' 가 커다란 고딕체로 쓰인 간판과, 입구에 소주병이 널린 형광색 텐트.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곳. 그리고 그 속에 뚝 떨어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안느. 우리는 어떤 외국어로 안느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영어? 프랑스어? 뭔가 말을 해야할 텐데. 사람들은 안느에게 끝없이 말을 건다. 터프한 한국적 외국어로.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주인공인 안느는, 지금 무엇을 보고 듣고 있나. 만약 한국인이 주인공이 되고, 그가 길잃은 외계인처럼 혼자 뚝 떨어진 곳이 시칠리아의 시골 마을이나, 티벳의 한 마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 나름대로의 그럴싸한 풍경이 나온다. 낯선 세계와 익숙한 화자. 익숙한 세계와 낯선 화자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흥미로운 시점 아닌가?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문법이다. 각종 여행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소설과 영화. 멀리 본다면 판타지나 SF까지.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세계는 터프한 날것일수록 깊고 풍부한 질감을 가진다. 그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게 보일수록. 


이 영화가 너무나 평범한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면, 주인공이 안느라는 것을 떠올리자. 그녀는 지금 굉장히 이상한 나라에 와있다.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쓰는 말도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다. 단 한 번, 안느가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말하는 순간이 있다. 아주 잠깐, 꼭꼭 숨겨졌던 그녀의 시점이 노출되는 순간이 있다. '나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절에서 그녀의 소망을 적은 기왓장이 비에 축축하게 젖어가던 모습과, 그 위로 중얼거리던 그녀의 프랑스어. 그 한순간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는 그녀의 세계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 그건 오히려 그녀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 사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런 낯선 질감의 홍수에 흠뻑 빠져서 그 촉감을 한껏 느끼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의 리얼리티는 누군가에겐 환상이다. 자, 처음부터 다시 볼 수 있을까. (내레이터가 있긴 하지만)그녀가 주인공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의 제목은 <다른나라에서>다. '우리나라에서'가 아니다. 


-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서있는 촌스러운 복장의 해양구조원은, 그녀의 눈에는 거의 우주에서 날아온 에일리언이나 다름없다(조금 과장).

- 찾아 헤매는 등대나 눈앞에 있는 랜턴이나, 사실 그리 중요해보이진 않는다. 


드리핑

  

무릎팍도사 유준상편에서 홍상수 감독의 즉흥성을 알 수 있었다. 여행 온 프랑스 여자, 안전 요원. 이 두 가지 외엔 거의 정해진 것 없이, 그리고 촬영 중간중간 우연히 가져간 소품과 배우들의 행동, 에피소드 때문에 즉흥적으로 바뀌는 서사들. 떠오른 것은 물감을 아무렇게나 뿌려서 작품을 만드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 


 


키워드는 '우연'이다. 사람은 논리적인 동물이라서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 작위성을 벗어나기도 힘들다. 우연은 그것을 아주 쉽고 효과적으로 해방시킨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하나의 인간을 초월한다. 현대 예술의 고유한 특징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오랜 기원을 가진 미학 방식이다. 갈라진 발굽과 쪼개진 거북이 등껍질, 아무렇게나 흩은 대나무조각들로 점을 보던 고대인들. 아무렇게나 뭉치는 구름의 형상을 보고 신화를 상상하던 사람들. 나무의 나이테, 옹이 사이, 이불이나 벽지의 패턴 등에서 간혹 발견되는 사람과 동물의 얼굴 형상. 홍상수는 그런 우연을 충분히 활용해서 서사를 엮는 사람이다(라는 인상이다). 


그 효과는 '질감'이다. 소설을 쓰면서 '그냥 인물들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소설 안에서 뛰어 놀게 만들어요'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알다시피 큰 서사에 종속된 인물과 사물에는 질감이 없다. 특유의 사물성을 잃고 있어야할 곳에 그저 배치되기 때문에. 그러나 사물성을 가진 독립된 인물들이, 개개인이 서로 제멋대로 자신의 질감을 유지한 채로 섞인다면, 우연히 어떤 독특한 파장과 간섭무늬를 얻을 수도 있다. 그렇게 기타와 노래와 텐트와 소주와 화살표가 있는 갈림길과 염소와 울음소리와 랜턴과 등대의 질감이, 거칠게 드러난다. 그것들이 저마다의 목소리에 취해 무의미로 흩어지기 전에 한데 묶는 것은 감독의 감각과 재량이다. 조금 쉽고 얄밉게 결과를 얻는 방법 같아 보이긴 하지만, 분명 감각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 중요한 음식. 역시 소주.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배우에게 실제로 술을 먹게 한다는 감독의 방침을 듣고 난 뒤에 본 영화라, 해변에서 안느와 해양구조원이 깡소주를 나눠마시는 장면은 정말 최고로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었다(양을 보니 또 그렇게 마신 것 같지는 않지만, 안느는 꽤 마셨으니). 보는 내가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기분. 


- 또 생각나는 음식은 삼겹살인데, 아무래도 그런 식의 직화구이는 취향이 아니라... 번개탄 맛이 고스란히 배인, 석탄인지 고긴지 모를 시커먼 뭔가를 우적우적 씹던 기억이 난다. 침을 뱉으니 까맣더라... 


- 평행세계. 각 장은 몇몇 주요한 장면들을 기준으로 몇 가지가 변주되는 형식을 취한다. 거기서 갈림길은 굉장히 중요한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하는데, 거기에 화살표가 이미 있다는 것과, 오른쪽, 왼쪽, 오른쪽 루트를 각각 택한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한 장치다. 꼭 루트가 있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등대는 아마 왼쪽에 있는 듯? 


-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앞서 말했던 안느가 프랑스어로 말하는 짧은 장면. 흠뻑 젖은 소망 기왓장. 


- 그래도 역시 한국인인 나는, 그 터프하게 익숙한 한국적 질감은 영 취향이 아니다. 이건 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인데, 어렸을 적에 집에서 느긋하게 컴퓨터나 하고 싶은데 끌려가다시피해서 나온 가족여행은 꼭 이런 '모항' 같은 곳에 가더라...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은 내가 가장 여행하고 싶지 않은 공간 중 하나다. 습한 공기와, 우중충한 바다, 습기 먹은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 색이 선명해서 우울한 간판들... 


- 배우가 너무 익숙해도 몰입이 안 된다. 내 눈에 보였던 것은 '권해효'와, 꽃보다 누나의 윤여정, 하이마트로 가야할 것 같은 해양구조원, 도올 스님......


- 내게는 너무 익숙해서 모험을 할 수 없는 근친적 공간들 


- 영어는 차라리 둘다 못 할수록 뜻이 더 잘 통한다, 는 법칙.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이미지 출처 : 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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