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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28. 2018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장자와 나비. 그러나 나비는 어디에?'

Being John Malkovich 1999 -스파이크 존즈

 



장자와 나비


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영화. 


외양은 다르지만 많은 점에서 같은 감독의 2013년작 영화 <Her>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테오도르(Her)와 크레이그(존 말코비치 되기) 두 남자 주인공은 모두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 '상태'란 그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이 아니라, 거의 존재적인 상태를 말한다. 자신의 지금의 시점(육체적)을 가지고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한계. <Her>가 '무언가 다른 존재와 소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는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 소통하는 것'으로 서사를 풀어 나간다. 전자가 그리하여 어떤 궁극적인 위안과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바라보게 만들었다면, 후자는 그저 천박한 욕망의 끝에 닿을 뿐이다.  


장자가 나비가 되면 뭘 할까. 상식적으로는 아마 가능한 열심히 하늘을 날지 않을까. 그것은 이전의 자신의 상태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것이니까. 그러나 <존 말코비치 되기>의 서사는 그리 상식적이지 않다. 유명한 영화배우인 존 말코비치가 된 크레이그와 로테가 하는 것은 맥신의 환심을 얻기 위해 바둥거리는 것 뿐. 존 말코비치의 삶을 살아간다거나, 그의 부나 명성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존 말코비치'라는 것은 그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목적을 이루는 데 조금 도움이 되는, '유리한'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 크레이그는 그의 유명세를 자신의 원래 꿈(인형사)을 실현하는 데 이용할 뿐이고,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맥신의 연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존 말코비치'란 단순한 도구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자아실현의 도구가 된다. 모두가 존 말코비치가 되기 위해 200달러를 내지만, 정말로 '존 말코비치'가 되길 원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존재가 가진 무언가 다른 조건을 가지는 것,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타인(말코비치)'이란 '관계'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체험'하고 싶은 대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인형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인형사의 눈을 하고 있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다. '육체가 바뀐다'는 모티브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그 상황에서 다른 육체로 들어간 사람은 그 육체가 본래 수행하고 있던 역할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을 바로 시작한다. 그러나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의 몸에 들어간 사람들은 정작 '말코비치' 그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로테는 그녀가 들어간 몸이 말코비치가 아닌 다른 남자이기만 해도 별 상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크레이그는 말코비치가 보석도둑을 연기한 배우였건 뭐건 곧바로 인형사로서의 꿈을 실현한다. 닥터 레스터와 그의 친구들은 생명 연장의 육체가 필요할 뿐이다. 그의 몸에 들어간 직후부터, '존 말코비치'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말코비치? 말코비치. 말코비치!


'말코비치'의 실종은 영화의 방향성의 실종을 의미한다. 나는 이 영화를 세 가지 방향을 쫓다가 길을 잃어버린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첫 번째 길은 '만약 존 말코비치가 된다면 어떨까?'라는 최초의 질문이다. 종종 소설이나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 모든 것이 시작되는 최초의 엉뚱한 상상력. 이 영화가 아마 그 질문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영화는 존 말코비치가 된다면 일어날 일들을 '잠깐' 나열한다. 그 이후에 존 말코비치는 실종된다. 하필이면 '존 말코비치'일까, 라는 문맥의 말코비치는 이미 없다. 그저 유명한 영화인 하나, 그리고 본래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그의 위치. 그 정도의 의미다. 간혹 주변에서 '존 말코비치다, 말코비치 맞죠?' 정도로 수근거리기 위한, 엉뚱한 고유명사. 


두 번째 길은 '낮은 천장'이다. 제임스 머틴 선장과 그의 난쟁이 아내의 일화가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처럼, '평범'했던 모두가 허리를 굽히고 다녀야 하는 7과 1/2층의 '낮은 천장'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다른 주체의 공간. 그리고 그것의 간접적인 체험이다. '다른 주체의 체험'이란 모티브는 <Her>에서 타인의 육체를 잠시 빌려 테오도르 앞에 나타난 사만다의 연출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도 중요한 메인 모티브다. 테오도르가 낯선 여자의 몸에 '깃든(?)' 사만다에 전혀 몰입하지 못하는 데 비해, 말코비치의 몸에 깃든 로테와 크레이그는 그와 거의 같은 상황의 말코비치와 관계하며 황홀경을 느낀다. 말코비치의 눈 안에 깃든 로테의 시선을 느끼며 '두 사람이 함께 완벽한 욕구와 애착을 가지고 한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을 아냐'고 묻는 맥신의 비중 있는 대사는 사실 좀 막연하다. 그것은 그저 일반론적인 황홀경의 막연한 형태에 기대어 공감을 호소할 뿐이지, 인형사였던 크레이그나 동물 사육사인 로테의 서사와는 동떨어진 개념에 불과하다. 때문에 로테의 눈이 먼 듯한 맥심을 향한 욕구도 난데없이 느껴지며, 이야기 자체와 섞이지도 않는다.  


세 번째는 인형이다. 물론 '인형'은 '철학'이라든지, '자아'라든지, '복제'라든지, 자주 쓰이는 소재다. 이상화된 세계,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는 세계를 인형을 사용하여 대리충족하는 크레이그의 모습은 어딘지 낯익다. 익숙함을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개인적으로 그가 땀을 흘리며 자신의 인형극에 열중하다가 병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는 그 첫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때까지 그는 음침한 취미(혹은 생업)를 가진 (결혼한)외톨이일지언정, 불륜에 눈이 멀고 그마저도 실패해서 진흙을 뒤집어 쓰고 절규하며 뛰어다니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인형사가 찌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칙 같은 것은 없지만, 그의 못난 캐릭터를 생각하다가 새삼 그가 움직이는 인형들의 (정말로) 멋진 연기력에 몰입해서 감탄하기란 또 쉽지가 않다. 그는 가진 것도, 되는 일도 별로 없었는데, 밑바닥까지 그렇게 찌질해야 했을까. 맥신이 뭐길래 말코비치란 인간한테 들어가 몇 년을 나오지 않고 (대머리로) 살아가야 했을까. 그가 한밤중에 자신의 작업실에서 정성껏 만든 인형들을 가지고 했던 진심어린 인형극은 다 뭐였을까.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움직이고, 다르게 느끼는 것' 그 다음에 와야 할 말은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이 세가지 주요한 모티브들이 서로 기민하게 엮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자의 나비'라는 테마는 어디든지 날아가 앉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유기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도 없고, '딜레마'도 없고, '질문'도 없다. 닥터 레스터와 친구들의 문제인 '영생적 자아'는 사족이라고 치자. '이기적 유전자'의 영원한 여행과 영생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잖아? 


아마 이 모든 것은 '만약 존 말코비치가 된다면 어떨까?'라는 최초의 질문을 의미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덧붙이고 접붙인 소재들의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들은 각기 '장자적 의미'에 개별적으로 연관될 수는 있겠지만, 서로간에 시너지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를 산만하게 만들고, 의미적으로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저러한 상황의 내가) 만약 (이러이러한 조건과 특징을 가진) 존 말코비치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된다면 어떨까? 사이사이에 의미를 위한 영양분을 이것저것 갖다 붙였고, 이 영화는 실은 '이러저러한 상황의 내가', 즉 특정한 한계를 가진 제한적인 주체(자아)의 존재적 문제에 관심이 가장 많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거기에 온전히 집중하지도 못했고(<Her>에선 본격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 다음에 보여주어야 할 어떤 대답은 여전히 막연한 백지로 남게 되었다. 딱히 퀴어 영화도 아니었을 텐데, 그럴싸한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과연 유의미한 어떤 대답이었을까?








- 초반 '인형사'와 '낮은 천장'이라는 낯선 조합이 좋았다. 어떻게 엮일 것인지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 인상적인 음식은 당근 쥬스. 이제는 뻔한 소재가 된 '우유'가 아니어서 좋았다. 엉뚱하지만 선명하고 진한, 이 영화의 색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아이템. 


- 어차피 상상과 허구의 세계에서 개연성은 촌스럽게 따라붙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약간 빗나가지만 흥미로운 '디테일' 하나면 충분하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라). 이제 우리는 눈앞에 재현된 사건과 서사의 현실성을 따져야하는 미학적 태도에서 벗어나, 그 사건과 모티브가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줄 지에 집중해야 하는 시대에 와 있다. 


- 존 말코비치를 미리 잘 알고 보았더라면 다른 느낌이 들었을라나.


- 남자의 육체를 한번 체험한 로테는 크레이그에게 '썩 마이 딕'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 같은데, 자막은 그냥 간단하게 '닥쳐'정도로 해석했던 것 같다.


- 또 간만에 <인사이드 아웃> 이후 정말 미친 장면을 보았다. 그렇다. 화제가 되었던 LG 휴대폰 G5의 광고가 생각나게 만든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 유사성.... 정신나감... 


- 진짜 안에 누가 들어간 것 같은 존 말코비치 본인의 연기가 인상적. 


- 간만에 장발 안경(존 레논 스타일) 캐릭터가 나와 반가웠다. 


- <Her>를 추억하던 중 말도 안되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테오도르가 <글래디에이터>의 코모두스라고??? 충격.


- 7과 1/2층에 가는 방법. 가장 재치있는 아이디어였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http://new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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