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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n 21. 2018

[영화] 7인의 사무라이

'따스한 밥 한 공기를 위하여'

七人の侍, Seven Samurai 1954 - 구로사와 아키라



장르로서의 사무라이


한때 사무라이라는 말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들리던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주입되었던 반일 감정과, 역사적으로 '사무라이'들에게 바로 옆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어 온 나라 출신이라 그런지, 사무라이라고 하면 뭔가 왜적이나 나쁜놈이라는 이미지에서 결코 벗어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무라이라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뭐 잔인무도한 인간들이었을 것이다. 칼을 들고 민간인 사이를 떠돌며 아무렇게나 사람들을 위협하고, 거슬리면 죽이고. 개중에는 나름의 신념이나 주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왜란 때 앞장서서 이 땅을 약탈하러 다닌 녀석들도 분명 그들이다. 


그러나 자라서 그런지, 혹은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본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반감과 함께 사무라이에 대한 반감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사무라이의 야만스런 칼 앞에 목이 떨어질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아도 되는 현 시대에, 모든 역사적, 문화적 요소를 모조리 흡수하고 녹여버리는 자본주의 앞에서 사무라이라는 것도 하나의 콘텐츠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선물상자에 잘 포장된 '사무라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특히 서양의 젊은 세대 내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소비품으로 바뀌었다. 바람의 검심, 사무라이 참프루 등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스타일리쉬하게 재해석한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이 있고, 그것을 원하는 장르적 소비자들도 많다. <7인의 사무라이>가 <황야의 7인>이라는 서부극으로 리메이크 됐던 것도 그런 사무라이들의 매력과 관련되었던 것은 아닐까(우리도 카우보이라는 멋진 녀석들이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1954년의 장르적 인식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7인의 사무라이>가 그런 장르성을 즐겁게 이용한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사무라이에 익숙한 일본 내 평범한 관객들만 노린 것이었다면, 제목이 7인의 '사무라이'이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장르성'이라는 것을 소비자의 측면에서 발생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장르 문학이든 장르 영화든 그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이미 알고 있고, 이런 느낌의 무언가가 진행되지 않을까, 이런 소재들이 나오고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을까라고 어느정도 예상되는 기대, 그리고 그 기대를 고의적으로 이용하고, 때로는 목적으로 삼는 종류의 작품들 앞에 나는 '장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는 그런 점에서 분명히 장르적이고, 그의 유명한 다른 작품인 <라쇼몽>의 작가주의적인 측면과는 대비된다. 


그리고 장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에, 그 작품의 작품성을 메시지의 묵직함이나 작품 내의 사회 인식 등에서 굳이 찾으려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넌센스다. 물론 <7인의 사무라이>라는 작품에선 그런 종류의 의도를 찾을 수도 있다. 당시 농민들의 계급적인 비극성과 사무라이 계급(몰락한 낭인들)의 특징들을 조명한다든지, 혹은 농민들의 생명력과, 무사 계급과 전쟁의 허망함이라든지. 


그러나 3시간 30분을 넘어가는 플레이 타임동안 쉬지 않고 우리의 눈에 비친 것은 사실 그런 것보다는 사무라이라는 콘텐츠가 가진 매력 그 자체다. 개성 넘치는 7명의 각기 다른(별 존재감 없는 두명 정도는 빼고) 사무라이 캐릭터들과, 그들이 처한 선명한 위기 상황과 타개, 그들 중 누가 가장 셀까(라는 생각은 남성 관객들이 주로 하겠지)-에 이어지는 누가 죽고 누가 살까, 그들이 결국은 이길까, 같은 솔직한 볼거리들이 사실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분명히 '작품성'의 범위 내에서 말해질 수 있다는 것도. 


그런 점에서 보자면, <7인의 사무라이>는 긴 플레이타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일단 마적들에게 대비해야 하는 농민들의 갈등상황과 그를 타개하기 위해 사무라이를 고용해야 한다는 동기가 분명하고, 그 사무라이들을 하나하나 찾는 과정이 재미있으며, 그렇게 모인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이 모두 개성 있고 흥미롭다. 자칫하면 그저 영화의 배경에 불과했을 농민들도 사무라이들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이중적인 포지션(패잔병 사냥)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입체적인 긴장감을 늦추지도 않는다.

 

수천, 수만명 규모의 대대적인 전쟁 스케일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는 40명 VS 7명 + 마을주민의 소박한 규모는 오히려 아기자기한 전투의 볼거리를 제공한다(그저 말을 타고 앞뒤로 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마적단의 무능함은 현실성 있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어이가 없다고 해야할지, 논외로 하고). 영화의 아주 중요한 미덕 중 하나, 관객을 그 자리에 앉아서 긴 시간을 감내하게 만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충분히 그렇다, 라고 답할 수 있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영화에 웃음이 좀 헤프고, 너무 훈훈함을 곳곳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1954년 사람들이 좀 낭만적이었겠거니하고 지나가면 또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하는데, 과거로부터 '명작'이라고 말해지는 작품들은 오랜시간 지속되는 묵직한 질문 하나를 남겼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영화 자체의 재미(라는 복합적인 개념)를 충실하고 빈틈없이 확보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작품성과 재미가 자주 분리되어 이야기되지만, 재미는 분명 작품성의 일부거나 (의미의 확장에 따라)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장르적이라면 더욱 진지하게.








- 내가 생각하는 사무라이의 가장 큰 매력은 이것이다. 우악스럽고 사람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무사인 그들은, 한편으로 꽃무늬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겹쳐있고 종종 단정하게 매무새를 고친다. 꽃을 꺾어 노닐기도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또 어찌나 공손한지. <7인의 사무라이>에서만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장작을 패거나 밥을 먹거나 하기 전에 꼭 복장을 단정히 손보고 일정한 의식에 가까운 어떤 손놀림을 보여준다. 머리카락도 벨 것 같은 시퍼렇고 기다란 톱니무늬 칼과, 예쁜 보자기로 감싼 꽃무늬 도시락이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들. 그런 갭이 꽤나 매력적이다.


- 영화가 끝나고 눈에 선명히 남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미후네 도시로의 엉덩이.. 이 사람은 <라쇼몽> 때와 캐릭터가 거의 바뀌지가 않았다. 칼 한 자루 달랑 들고, 거의 헐벗은 채로 소리지르고... <7인의 사무라이>에서 그는 자신의 엉덩이의 매력을 한껏 선보인다.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고, 논두렁에 처박히면서도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 인상 깊은 음식은 만두, 그리고 밥. 워낙 가난한 배경의 영화라 음식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인상적이다. 맨발로 오래된 나무 장판을 터벅터벅 밟으며 다가와 권하는 팔다 남은 만두 몇 개. 그것조차 살 수가 없어 농부들은 한숨을 쉬고, 울고. 그러면 그 만두를 가진 녀석이 뭔가 대단한 재산가처럼 보이면서 그 만두가 몹시 탐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영화가 끝나고 마트에서 장을 보며 똑같이 생긴 감자만두를 한 봉지 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음식은 바로 '밥'이다. 농민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던 사무라이의 발걸음을 기어코 돌린 그것. 커다란 사발에 봉긋이 담긴 하얀 쌀밥. 어릴 적 항상 밥상에서 듣던, '농부들의 피와 땀이 어린', 그래서 남기면 안 된다던 그 쌀. 그것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밥'이란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실력있는 사무라이 네 명(그 중에서 가장 실력있는 사람도), 마적단 40명, 몇몇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약탈하기 위해, 또 보답하기 위해 벌였던 전쟁. 그것을 뒤에서 움직인 것은 다름아닌 그 밥이다. 게다가 인질로 아이를 잡은 산적의 경계를 잠시 풀었던 것도, 굶은 아이들에게 제 살을 떼어주는 것처럼 나누어 주었던 것도 하얗고 동그랗게 뭉친 주먹밥이 아니었던가. 위급한 상황에서 주먹밥은 왜 그리 항상 맛있어보이는지.


-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세의 수도사들도 그렇고, 사무라이들도 그렇고. 머리를 왜 굳이 그렇게 깎는 거지..






(이미지 출처 :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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