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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an 16. 2019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9와 4분의 3, 가장 성공적인 캐쥬얼 판타지'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 2001 - 크리스 콜롬버스, 그리고 조앤 롤링





그렇다. 해리포터. 언젠가 한 번은 이 작품을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2001년작이었다, 세상에...). 


이것은 해리포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혹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권과 1편(마법사의 돌)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해리포터를 접한 적이 없어서, 요즘 들어 소설과 영화를 한 편씩 제대로 정독하고 있다. '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은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았고, 이제 '아즈카반의 죄수'를 소설로 읽고 있는데, 이쯤에서 순서를 바꿔야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소설을 먼저 읽으니 영화의 단점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으므로. 


일단 정주행을 시작한 이후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첫 번째는 해리포터가 동화(?)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해리포터를 처음 읽었던 것은 아마 중학교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컴퓨터 게임에 매달려 있던 나는 부모님께 귀를 잡혀서 속초의 어느 산장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컴퓨터를 1박2일간 할 수 없게 된 나는 출발부터 잔뜩 심통이 나서 툭 튀어나온 입을 결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집어넣지 않기로 굳게 다짐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산장에는 정말로 컴퓨터 한 대 없었고,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산장 주인의 개인적인 취미로 보이는 007 시리즈 전집 비디오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사촌동생이 가져온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상, 하권이었다. 컴퓨터를 하느라 책을 멀리하던 그 때에, 정말 감옥에 갇힌 참담한 심정으로 그 책을 펼쳐들었는데, 툴툴거리면서 읽기 시작한 나는 금방 그 세계에 빨려들어가버렸고, 적어도 1박2일중의 몇 시간 정도는 책에 홀려 꿈결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 때는 그것이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동화였다니.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그 책을 잡고 읽으면서 종종 발견되는 '동화적 요소'들을 보며, 이 소설의 장르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론, 해리포터 시리즈는 단순히 동화이기만한 작품은 결코 아니다. 아니, 명망있는 판타지 소설 중에서도 이 정도의 업적을 이루어낸 소설은 역사적으로 두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본다. 물론 다른 하나는 바로 '반지의 제왕'이지. 


나는 어느 쪽이냐하면 '반지의 제왕파'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당시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던 반지의 제왕 영화 삼부작은 꼬박꼬박 챙겨보면서도, 정작 해리포터는 1편인 마법사의 돌을 제외하고는 거의 챙겨보지 않았다. 나는 해리포터의 장르를 '캐쥬얼 판타지' 정도로 정의하고 싶은데, 내가 끌리는 것은 분명 현실세계와의 연관성이 아예 단절되어 있는, 그럴싸하고 깊고 오래된 역사적 세계관을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고, 전쟁과 공격적인 마법이 거의 반드시 출현하는 '클래식 판타지' 쪽이다. '캐쥬얼 판타지'는 뭐랄까, 그런 것 보다는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덜 매니악한 접근법들(예를 들면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좀 더 대중적인 단어인 '마법사의 돌(Sorcerer's Stone)'로 바꾸어 말한다든지하는)을 구사하는 종류를 말한다. 불덩이를 날린다든지 번개를 내리치게 한다든지하는 '마법사'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깔모자를 쓰고 사람을 개구리로 변신시키거나 부글부글 끓는 알록달록한 물약을 조제하는 그런 '요술쟁이'들이 등장하는 판타지 작품들. 심각한 중세 덕후이기도 한 나는 좀 진지해보이지 않는, 아이들한테 자기 전에 들려줄 것 같은 그런 타협적인(?) 페어리 테일류의 이야기에서는 영 몰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한창 판타지 소설을 읽던 무렵, 나는 '이세계물'들을 극도로 혐오하였는데('이세계물'이란 바로 이런 것-어느날 고등학생이던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판타지 세계에서 깨어나, 어쩐지 언어는 통하고, 모험을 시작하고...), 첫 페이지에 무슨 한국사람 이름이 나오고 하면 바로 덮어버리고 읽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해리포터 시리즈는 조금 달랐다. '캐쥬얼 판타지(사실 실제로 존재하는 용어인지는 모르겠고 내가 막 붙인 용어다)'이면서, 동시에 '이세계물'이기도 한 이 해리포터 시리즈는, 묘하게도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독보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알버스 덤블도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이지 일반적인 '요술쟁이'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해리포터 시리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를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의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승강장의 존재가, 조앤 롤링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어디엔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감각을 만들어내고, 그 가짜 현실감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해리포터가 다른 판타지 소설들과 구별되는 가장 인상적인 지점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 '머글'의 세계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 지우개나 샤프 같은 현실의 학용품을 골랐을 아이가, 이제는 새로운 세계의 상점에서 자신의 마법 수업에 쓸 지팡이를 고르고 있는 그런 장면들. 언제나 현실의 더즐리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면서, 매혹적인 호그와트로 돌아가 꿈 같은 모험을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그러한 '넘나듦'의 장치들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매력적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해리포터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것이다.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번쯤 '나는 혹시 머글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상상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힘. 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렸다는 베스트 셀러 해리포터 시리즈의 매력은, '판타지'가 왜 '판타지'인지 가장 잘 이해하고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9와 4분의 3


자, 그럼 영화는 어떨까. 언젠가 <컨택트>영화를 리뷰하며 101%가 될 수 없는 훌륭한 노력에 대하여, 라고 아쉬워한 적이 있다. 원작을 가진 영화들의 숙명적인 딜레마이며, 원작을 '먼저' 보고 난 후에 접하는 영화들의 필연적인 한계를, 물론 해리포터 시리즈도 피해갈 순 없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았으므로,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얼마나 소설의 서사를 최대한 빠뜨리지 않고 상영 시간 안에 집어넣으려고 했는지 보이는 그 처절한 발버둥들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듬성듬성 빠져버린 중요한(내 기준에) 장면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생각보다도 조금 더 영화는 원작의 '진도 따라잡기'에 애를 쓴 모습이었고, 원작을 뛰어넘는 어떤 변형, 뒤틀림 같은 것들은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그렇지만, 나는 해리포터의 영화가 무척이나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젖살이 아직 빠지지도 않은 이 동글동글한 삼인방 해리와 헤르미온느와 론을, 그러니까 다니엘과 엠마와 루퍼트를 처음 스크린에서 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살아가면서 '소설을 찢고 나왔다'는 개념을 그들을 봤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느낀 순간은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 해리였고, 헤르미온느였고, 론이었다. 또한 심지어, 그들은 꽤나 긴 시간 동안 여러 시리즈를 통해 나이를 먹고 성장해갔다. 변성기를 거치고, 젖살이 빠지고, 키가 커지고, 변화했다. 그들과 함께 유년(?)을 보낸 '우리들'은 그 삼인방과 함께 현실에서도 자랐다. 일년에 한 번, 혹은 이년에 한 번 정도 우리를 찾아와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서로 확인했다(물론 나는 소식만 들었지만). 그것은 그저 '영화'로 생각하기엔 좀 더 특별한 감정이다. 다 자란 그 삼인방이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을 보며 괜히 뭉클해지는 것은 분명 그 세 배우, 혹은 그 세 캐릭터가 우리와 무언가를 공유하며 함께 자라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9와 '4분의 3'을 생각한다. 9는 영화의 완성도이다. 결국 10은 될 수 없지만, 이 영화는 소설 속의 세계관을 가시적으로 정말 멋지게 구현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해리가 지팡이 가게에 들러 자신에게 맞는 지팡이를 고르는 장면인데, 마치 현실에 있을 법한 그 종이 케이스들을 뒤적거리며(꼭 처음 간 신발가게처럼) 지팡이를 하나씩 건네고 시험하는 모습은 소설에서 설명한 것보다도 더 매력적이었다. '1학년들은 이쪽으로'라고 두근거리게 만드는 말을 크게 외치는 해그리드의 목소리와, 멀리 보이는 호그와트의 근사한 모습, 그것보다도 훨씬 근사한 호그와트의 내부, 퀴디치 유니폼과 목도리, 애들 상대로 혼자 유독 진지한 연기를 펼치는 세베루스 스네이프...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그 세계는 상상하던 것과 비슷하게, 어쩌면 더욱 정교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4분의 3'이라고 나는 독립적으로 생각한다. 주인공 삼인방은 영화가 소설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시도를 벗어나있다. 나는 소설을 먼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시 보면서 영화의 그 삼인방의 얼굴을 이제 지울 수가 없다. 그들은 특별한 존재다. 그것은 9에서 10을 채우는 그 마지막 1의 조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 다니엘과 엠마와 루퍼트는 살아가면서 결코 해리와 헤르미온느와 론을 벗어날 수 없을테지만, 아무려먼 어떤가. 오히려 나는 그들이 영원히 그 캐릭터에 얽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먼 훗날 나는 늙은 엠마 왓슨을 보면서, 아 이젠 헤르미온느가 저렇게 늙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겠지. 영화를 개봉했던 그 겨울과 어울리는 미스테리한 OST와 함께, 소설을 찢고 나왔던 그 야무지고 동그란 얼굴과 부스스하게 풍성한 갈색 머리와 처음 마주하던 순간을. 그것만은 해리포터 영화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특별'하다, 그들은. 



퀴디치


그런 이야기들과는 조금 별개의 이야기긴 하지만, 나는 퀴디치를 좀 싫어한다. 일단 이 퀴디치라는 스포츠는 너무나도 노골적이게 해리가 활약하도록 만들어진 게임이다. 룰을 보면 알 수 있다. 추격꾼, 파수꾼, 몰이꾼이니 하는 들러리들이 저희들끼리 티격태격거리며 열심히 발버둥쳐도, 수색꾼이 골든 스니치 하나만 잡으면 무려 일반적인 득점법의 15배인 150점의 점수를 획득하며 바로 게임이 종료되어버리는 이 요상한 스포츠는 사실 진지하게 스포츠라고 말할 수도 없는 밸런스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2,3점슛을 주고받으며 아무리 많아도 10~20점 정도의 점수차 경기를 하는 농구에서, 갑자기 웬 이상한 녀석이 45점슛을 확 넣어버리고 휘슬이 울리며 종료되어버리면, 도대체 그동안의 다른 노력들은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150점을 얻더라도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런 경우에는 골든 스니치를 일부러 잡지 말아야하는 오묘한 상황이 벌어지며, 애초에 150점 차이가 나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차이가 벌어져버린, 재미 없는 게임이 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구조적으로 특정 인물의 활약을 돋보이게 만들어진 한계를 가진 이 스포츠는 역시나 특정한 인물인 해리의 활약에 의해서 경기가 좌지우지될 뿐이다(적어도 2편까지 본 바로는). 슬램덩크라는, 1~2점 차이의 승부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드라마를 보고 자랐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의 스포츠가 바로 퀴디치인 것이다. 뭐 그래서인지 퀴디지가 나오는 장면은 항상 대충 읽고 넘기기나 빨리 감기. 퀴디치를 가장 좋아하는 해리라는 캐릭터에 이입할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또 그와는 별개로, 님부스 2000이니 파이어볼트니 하는 빗자루 메이커들의 상품성들은 또 매력적이긴 하지만. 













- 음식이라.. 해리포터 시리즈에서는 분명 매력적인 음식들이 나온다. 이 음식들은 보통 입맛을 자극한다기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이다. 온갖 맛이 나는 젤리나, 버터맥주(이건 후편에 나올 테지만), 덤블도어의 신호와 함게 호그와트 연회장에 그득하게 쌓인 완두콩과 닭다리들. 어릴적 처음 그 연회장의 음식들을 스크린으로 봤을때 들었던 감정은 아마도 '신기하다' 혹은 '신나고 즐겁다'였다. 다시 그 연회장의 음식들을 보자 바로 들었던 감정은 이제 '맛있겠다'와 '먹고싶다'로 바뀌어 있었다. 요즘 좀 배고픈 생활을 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듯... 


- 처음 주인공 삼인방을 봤을 때 감탄했던 것은 헤르미온느였다. 다시 이 영화를 보면서 감탄한 것은 론의 연기력이다. 헤르미온느는 꽤나 야무지긴 했지만 뭔가 잘하려는 노력 때문에 힘이 많이 들어간 느낌이다(그 잘하려는 게 헤르미온느로서 학업을 잘 해내려고 하는 것인지, 엠마 왓슨이 헤르미온느 역할을 잘하려고 하는 것인지 미묘하게 헷갈린다는 점이 포인트). 반면 론은... 정말 그냥 론인 것 같다. 어벙하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해리와, 좀 힘이 과하게 들어간 헤르미온느에 비해, 론의 그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는 분명 돋보였다. 


- 이상하게도, 버논 이모부한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왜인가. 고길동 같은 악역(?)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늙은 거라더니... 힘내 버논 더즐리. 넌 해리를 막을 수 있어...


- 다니엘과 루퍼트 모두 엠마 왓슨을 좋아했지만, 정작 엠마 왓슨의 첫사랑은 말포이 역의 톰 펠턴이라고 한다. 그래, 그래야 이야기가 재미있지.


- 주인공 삼인방을 처음 봤을 때 우와 정말 앳된 꼬맹이 아역들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왜 나는 루퍼트 그린트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건가... 심지어 '아니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가서 가수로 활동을 하네'라고 생각했던 보아는 알고보니 나랑 동갑이었다. 그 때의 나는 도대체 뭐였지...








(이미지 출처: http://mov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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