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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4. 2018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안드로이드라는 은유'

필립 K. 딕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밤에 가족끼리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은 세 개. 각자의 그릇에 면을 덜어서 후후 불며 식사를 한다. 그런 일상적인 순간 중에 아주 잠깐, 나와 우연히 눈을 마주친 아버지가 싱긋 웃으며 갑자기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잡더니, '뚜껑'을 열어서 그곳에 생물의 뇌 대신 자리잡고 있는 기계 장치들을 잠깐 보여주고 닫는다. 그리고 다시 라면을 먹는다. 


겨우 2초 남짓한 찰나의 순간. 그 2초의 순간만 제외하면, 일상은 여전히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엔 극심한 혼돈이 터진 봇물처럼 흘러나온다. 잘못 보지는 않았다. 재채기를 한 번 할 정도의 사소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은 그동안의 내 모든 시간과 가치관을 송두리채 흔들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준다. 나는 아버지가, 그리고 아마도 어머니 또한,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다(그래도 일단 나까지는 안드로이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그렇게 알게 된 이상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앞으로 어떤 감수성으로 부모님이라고 생각했던 안드로이드를 대해야 할 것인가?


한때 나는 사물과 생물을 철저하게 구별했다. 아무리 사람과 비슷하더라도, 그것은 결국은, 정말로 궁극적으로, 사물이다. 안드로이드가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고, 주장하고,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미래 사회를 다룬 영화나 소설을 보며 코웃음쳤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닥친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사물을 사물로 대한다면 끝날 일이다. 어떤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감수성의 찌꺼기일 뿐이다, 라고. 


그러나 그 불필요해보이는 감수성의 '찌꺼기'가, 여전히 내겐 있었다. 나는 안드로이드 부모님을 사물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가끔은 소중했던, 잃어버린 인형도 생각한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다른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찌꺼기'가 반드시 발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그것을 어떤 태도로 대하든지간에. 


감정이입


안드로이드는 왜 SF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가. 나는 안드로이드가 여러 작품들에 동원되는 의도로 꽤나 그럴듯한 추측을 했는데, 그것은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경우, 거의 반드시 '인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라는 최종적인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는 그걸 위한 도구였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에 대해 (새삼)말하기 위해 등장한다. 무엇이 인간인가? 무엇이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별짓게 만드는가? 자, 여기 안드로이드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인간이 있다. 정말로 겉보기에 똑같고, 생활하는 것도 똑같고, 그들과 사랑을 하고, 또 갈등을 겪고, 함께 지내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이 인간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 있을까?


그것을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감정이입'이라고 말한다.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작품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는데, 하나는 정체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존재를 고민하는 안드로이드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인간의 입장이다. 이 소설은 물론 철저하게 후자다(나는 거의 마지막까지도, 두 명의 메인 캐릭터인 릭과 이지도어가 결국 안드로이드인 것은 아닐지 의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가서 그것이 후자의 경우라고 결론지었다). 여러 안드로이드들, 특히나 레이첼의 행동들은 어쩌면 스스로의 자아를 가진 안드로이드의 고민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은 그들을 마지막까지 '대상'으로 인식했다. 깊이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인간의 관점이다. 엔딩은 인간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엔딩을 가지지 못했다. 레이첼은 인간인 릭의 심리에 어떤 파문을 가져다주기 위해 소품으로 쓰이고는 사라졌다. 결국 안드로이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것이 이 소설의 질문이다. 그들에게 어디까지 감정을 이입할 것인가? 


사실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을 이입할 이성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물인 이상(보이그트-캄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상) 그들을 인간처럼 대하는 것은 감수성의 찌꺼기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 사실에 철저해야하는 것은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는 현상금 사냥꾼인 릭이다. 그리고 그는 하루 동안 안드로이드 여섯을 은퇴시킨, 지구에서 가장 유능한 현상금 사냥꾼이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안드로이드에게 가서, 테스트를 잠깐 실시하고, 망설임 없이 레이저 총으로 안드로이드의 기계 머리를 박살낸다. 


레이첼과 거의 똑같은 모습의 프리스를 별다른 내적 갈등 없이 박살내는 데 성공한 릭은 여전히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쉽게 구별할 줄 아는 유능한 현상금 사냥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애초에 갈등할 여지가 릭이 레이첼이라는 안드로이드에 감정이입을 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그는 안드로이드와 섹스를 했다. 기구를 이용한 자위기구라는 의미 이상의,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의 의미로. 그는 어느새 안드로이드를 인간처럼 대하고 있었다(이미 그는 여러 안드로이드와 불필요한 대화들을 많이 나눴다). 그의 보이그드-캄프 테스트는 성능을 잃었다.  


"머서가 닭대가리 이지도어에게 주었던 거미, 그것도 아마 가짜였을 거야.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전기 동물들에게도 그들만의 삶이 있는 거니까. 그 삶이 아무리 빈약한 것이라고 해도." 


소설의 마지막에, 지친 릭의 입에서 결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말이 나온다. 그가 사물에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어디서 비롯하는가. 그가 구원처럼 집어든 두꺼비의 배에서 조그만 제어판이 발견된 뒤에도, '자격은 되지만 누리지 못했던 평화'를 느낄(그는 기분 전환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외로운,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풍성한 실존


그는 머서와 융합한다. 모든 일을 끝내고 황무지로 홀연히 날아가 머서의 환상을 스스로 재현해보는 릭의 모습은 서사적으로 좀 뜬금없고 갑작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의미있는 그 행위를 통하여 머서주의(그것이 거짓이라고 밝혀진 후에도)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그는 모든 인간과 (감정적으로)융합된 것일까?


"이상해. 나는 내가 머서가 되었다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환상을 느꼈고, 사람들은 나를 향해 돌을 던졌지. 하지만 감정 이입기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느끼던 것과는 달랐어. 감정 이입기 손잡이를 잡았을 땐 머서와 '함께 있다'고 느끼잖아. 내가 느낀 건 내가 그 누구하고도 같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어. 나는 전적으로 혼자였어."


오히려, 그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고립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단계는 그는 혼자라는 것. 즉 실존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가 혼자라는 것은, 그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들과 구분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그는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다르다는 사실을 넘어서, 자신과 타인이 다르다는 영역에 도달하였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인격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인격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물. 그것은 안드로이드인가? 단 한 번이라도, 고독한 실존의 영역에 도달해본 적이 있는 사람, 머서주의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실은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와는 존재양식이 다른 존재. 나의 정신과 스스로를 인식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그 확신이 나와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실은 도저히 그렇게 확신할 수 없는 존재. 살아있는 동안 의심할 수 없는 '나'라는 확실성과는 다르게, 나와는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기묘하게도 '사물성' 또한 가지고 있는 '타인'이라는 존재. 


나는 언젠가 어릴 적에 가장 친한 친구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들은 이야기를 기억한다. 도로의 한가운데였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지나치는 중이었다. 친구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쩌면 인형이 아닐까 생각해. 감쪽같이 인간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인형들. 세상에는 생명이란 나만 존재하고, 나는 누군가가 만든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연극에 동참하고 있는 거지. 나 외의 다른 모두가 사실은 인형인거야. 심지어 너조차도.'

맙소사. 그것은 내가 종종 혼자서만 하곤 하던 바로 그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나는 '오, 이 안드로이드가 나를 속이기 위해 정말 교묘하고 섬세한 거짓말을 생각해냈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이야!' 하는 생각까지 잠깐 해보았다. 그것이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 발상은 지극히 중2병(아마.. 정말로 중2시절 무렵이었다)스럽긴하지만, '타인의 사물성'이라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누구에게나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고, 그리고 많은 행동들에서 그것이 발현되기도 한다(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순간마다 다른 사람들을 사물처럼 대하곤 하는가).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애초에 '사물'이라는 것은, 생명과 그 외의 것을 나누는 분류법이 아니라, 유일한 '나'라는 존재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과 인식의 문제인 것은 아닐까. 내가, 내가 아닌 세계를 대할 때 나타나는 어떤 감수성은 아닐까.


바로 이 순간에 최초에 생각했던 안드로이드와 사람의 명징해보였던 구분법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애초에 '나'에게는 진정한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사물성'을 완전히 지워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과 '안드로이드'사이에 존재하는 그 교집합인 사물성 때문에, 이제 나의 윤리(대상을 '대할 때'의 문제)의 기준은 그 대상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문제로 귀속된다. 즉, 그 대상이 안드로이드냐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대하는 나의 방식에 본질적인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를 죽이는(부수는) 행위와, 사랑하는 곰인형의 목을 자르는 행위. '사물'에 대한 가해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아닌 세계를 대하는 나의 문제'는 결국 많은 부분, 어쩌면 모든 것이 관찰자인 나의 '감각적 영역'의 문제이다. 이 감각의 영역에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는 이성도, 보이그트-캄프 테스트도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레이첼을 보는 나의 감정, 서로 나눈 말, 섹스 등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릭은 레이첼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안드로이드를 인간으로 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이입'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감정이입의 대상을 또 다른 타자에게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기형적인 행동이 아니라, 고독한 실존의 끝에서야 확인할 수 있는 진정한 존재인식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란 '타인'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기계 두꺼비와, 전기 양과, 아내인 아이란이라는 타자들 사이에서,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평화를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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