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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Feb 28. 2019

[영화] 무드 인디고

'부담스러운 볼록거울의 세계'

L'ecume des jours 2013 - 미셸 공드리





무드 인디고를 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뭐, 그럴 수 있지. 두 번째, 좀 작위적인데. 세 번째, 이걸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처음에 걱정한 것은 그 상상력의 밀도를 과연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수도꼭지에서 장어가 나오고, 연주하는 음악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칵테일을 만드는 피아노. 때려 부수면 더 작은 벌레가 되어 기어다니는 알람시계. 그런 엉뚱한 상상력(상상'력'이라고 말하는 순간 '긍정적인' 가치라고 저절로 전제하게 된다)이 온갖 색채와 함께 강렬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과연 이 상상력의 밀도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중에 힘이 빠져서 용두사미로 끝나게 되지는 않을까. 서사를 진행하다가 이러한 상상력이 작동하는 세계관이라는 것을 혹시 깜빡하지는 않을까.


영화가 끝나가면서 그것이 괜한 걱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드 인디고>는 분명히 그 상상력의 밀도를, 거의 끝까지 제대로 유지했다. 스스로의 상상력에 책임을 충분히 졌고, 그 세계관은 자신의 룰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했다. 마지막까지 그들은 허공을 둥실둥실 날아다니며 땅에 발을 붙이지는 않았고, 알람시계는 여러번 반복해서 등장했지만 항상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주가 되며 부서졌다. 주유기 같은 총을 쏘아대고, 관은 집 밖으로 던지고, 집은 점점 작아지고. 


그러나, 나는 그때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 상상력이 끝까지 유지되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것이 기발한 상상'력'이 아니라, 그저 '집착'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볼록거울의 세계


<무드 인디고>의 핵심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는 '비글무아 춤'을 보면서 나는 이 영화의 최초의 발상이 볼록거울을 본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언젠가 볼록거울에 동그랗게 뒤틀린 자신의 다리를 오른쪽 왼쪽 번갈아 들어보면서, 왜곡된 그 세계의 우습고 유쾌한 모습에 그 거울 속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그 세계의 무도회에서는 이런 춤을 추겠지, 하고. 


분명 처음에 그것은 재미있었을 것이다. 왜곡된 세계의 아이디어를 이것저것 떠올리면서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고. 이런 것은 어떨까, 이러면 웃기겠지, 이런 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하며 머릿속이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로 넘쳐 흘렀을 것이다. 


정말로 몇몇 상상들은 재미있었다. 특히나 초중반부에는 그랬다. 영화가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의 안내를 받으며 기발한 풍경들을 감상하게 되는 것은 관객으로서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편안하게 앉아서, 선명한 색감으로 살아난 엉뚱하고 유쾌한 아이디어를 감상하며, 하하, 저것 좀 봐, 하며 미소를 지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중반이 지나가면서, 관객의 초점은 바뀌게 된다. 이 영화에는 분명한 서사(콜랭과 클로에가 만나서 사랑하고, 병들고, 발버둥치며, 죽어간다는)가 있다. 니콜라와 콜랭의 유쾌한 일상을 보여주는 초반부에는 '세계관의 소개'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상력들에 집중하며 즐길 수 있었지만, 콜랭이 클로에와 만나 연애를 하며 서사가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이제 그 '세계관의 소개'는 불필요한 부분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제 이 세계에 충분히 발을 들였고, 지금부터 궁금한 것은 그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서사는 어떨까. 그것은 그냥 사랑이야기이다. 특별할 것 없는. 금전적으로 부족할 것 없이 살던 콜랭은 클로에의 폐에 수련이 피기 시작하면서 병원비를 대기 위해 돈을 쓰고 일을 하고, 친구였던 시크에게 돈을 도둑맞고, 가세가 점점 기울면서 클로에는 죽고 자신도 파멸(아마도 물에 뛰어들게)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볼록거울을 통해 보더라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똑같다. 만나고, 서로 사랑하고, 병들고, 아파하고, 죽는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볼록거울'을 통해 삶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여기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이 없다. 그냥 그게 재미있고 좀 웃기니까,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까? 물론 우리는 가끔 일상을 조금 뒤틀어서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은 언제나 건조하고, 볼록거울을 통해서 보면 잠시나마 그것이 촉촉해보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중에는 분명히 부담스러운 순간들이 오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크레인을 이용한 구름차(혹은 백조?)로 데이트를 하는 장면부터 좀 물리기 시작했는데, 아마 그 때부터 관객의 초점이 '세계관의 소개'에서 '콜랭과 클로에의 서사'로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 장면까지는 영화를 여전히 보고 있으므로 이미 세계관에는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 상태이다. 스케이트 장에서 '꼬리 잡기'를 한답시고 허리를 길게 쭉 늘리는 걸 보면서도, 아... 뭐.. 그럴...수도.. 있지 이런 세계라면... 이라고 생각은 할 수  있지만, 큰 불만은 없는 상태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을 속삭이고, 병원을 찾고, 걱정과 위로를 하고, 좌절하고, 죽어가고, 슬퍼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건 어때? 이런 것도 기발하지? 하고 자꾸 아이디어 카드를 들이밀며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는 그 시도들은 분명히 부담스럽다. 


서사에 집중해야할(비록 그 서사가 별 것이 없다고는 해도) 순간순간마다, 집중을 방해하는 그 '일방적인 보여주기'가, 과연 도중에 그 아이디어의 밀도를 유지해야하는 의무를 깜빡해버려서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과연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무드 인디고>라는 영화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책임을 지는 '일관성'이 아니라, 그저 몇몇 아이디어를 보여주기 위해 유지하여야하는 세계관에 대한 어떤 집착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나는 문득 <라라랜드>가 떠올랐다.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기법, 표현이 캐릭터, 서사, 음악 등 모든 것과 어우러져 화려한 빛깔로 관객의 모든 감각을 들었다 놨다 하며 호흡마저 조절하게 만드는 그 입체적인 영화와는 달리, 엉뚱한 상상력이란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끊임없이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스로 사로잡혀서, 특별할 것 없는 서사조차 등한시하고, 오직 그 상상력을 과시하다 못해 지루한 습관으로 전락해버리게 만드는 그 아집. 처음에는 너무 기발하다, 라며 감탄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아이디어로 끝나버리고, 그것을 영화가 스스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첫맛은 고소하나 부담스러운 기름 맛만 남게 되는 두터운 튀김옷의 튀김처럼,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흑백, 고요


이 영화에도 소름끼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고요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구름차를 이용한 데이트가 끝나고, 6개월이 지나 그들의 관계가 자연스러워진 시기의 콜랭의 침실 장면이었다. 서로 조심하던 낯선 두 사람이, 이제는 가장 내밀한 장소에서 자신 안의 깊은 곳에 있던 카드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씩 내밀고 공유하는 것.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 것. 그것이 연애의 시작이었다. 


나는 니콜라가 갑자기 멀쩡한 음식(더 이상 털실이나 봉제인형이 아닌)을 가져오는 그 장면에서 굉장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처음의 그 발랄하고 '시끄럽던' 상상력의 문법이 사라지고 아무런 왜곡도 없이 저벅저벅 음식을 들고 걸어오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연애가 시작됨과 동시에, 현실적인 세계가 시작되는구나. 안정감있고, 물질성이 온전히 느껴지는. 그리고 그 발랄하던 솔로 시기의 환상적인 질감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지금 고요해진 멀쩡한 세계의 낯설면서도 익숙한 정적과의 그 간극을 체감하며 잠시나마 소름이 확 끼쳤는데, 그건 그냥 나만의 상상이었다. 콜랭과 클로에가 스케이트장에 가기 위해 침대에서 점프를 하며 그들의 옷이 순식간에 바뀌었고, 나는 좀 탄식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장면이나 시도가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만약 그 간극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분명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름끼치면서 입체감 있는 영화는 그들이 스케이트장에 가면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내 머릿속 저편의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이 영화가 택한 것은 '흑백전환' 기법이었다. 기법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삶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채도를 천천히 잃더니 완전히 몰락하고 죽음을 마주하게 된 그 때 거의 흑백영화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명백해서 딱히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평범한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나는 어떤 갈림길에서 선택되지 않고(어쩌면 아예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멀리 사라져버린 그 '소름끼칠 수 있었던' 영화가 조금 아쉬웠다. 그랬다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가득 채웠던 그 부담스러운 아이디어들이 방향성을 가지고 충분히 이용될 수 있었을 텐데. 그 발랄한 상상력들을 단지 상상력으로만 즐기기에는 그것들이 좀 아깝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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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적인 음식은 니콜라가 차린 여러 가짜음식들을 들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전혀 군침이 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나 닭깃털파이는 말할 것도 없다. 내 경우에 묘하게 군침이 도는 음식(?)은 바로 크롬 당근. 나는 은색의 금속성 질감에 묘하게 끌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음식으로 표현되자(토끼가 먹지만) 기묘한 공감각적 식욕이 느껴졌다. 크롬, 크롬. 입안에서 단어를 굴리며 계속 군침이 돌아서 찾아보니 먹으면 큰일나는 중금속이다. 


- 니콜라의 그 환하고 사람 좋은 미소와 목소리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아른거렸다. 마치 체셔고양이처럼. 내가 저 사람을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하면서 찾아보니 <언터쳐블>. 아 역시. 오마 사이. 기억해둬야지. 


- 물론 <아멜리에>는 잊을 수 없다. 


- 아, 쥐 만큼은 좀 없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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