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끄덕임에 대하여'
무척이나 종교적인 영화였다. 특정 종교의 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가 '예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대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말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미 확고한 가치로서 숭상되고 있는 시, 소설, 음악, 미술 등의 예술들. '시'라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예술적 발언이 되는 화법. '당신을 위해 시를 썼어요.' '시'라는 단어는 문장에서 유일하게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영화 내에서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한치의 의문도 없이 일방적인 숭배만이 있을 뿐.
발자크, 조이스, 베토벤, 보들레르.. 마치 바울, 요한, 베드로, 유명한 성인들의 이름처럼 언급되는 그들의 이름은 그 고유명사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리시한 악세사리이며, 이름만 들어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오히려 그 끄덕임 하나를 목적으로 동원된 것들이기도 하다. 근사한 끄덕임. 공유되고 있는 어떤 코드로의 동참('끄덕임'의 다른 예도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다. '말러' '김승옥' '노자' '장 뤽 고다르'..). 그들을 숭배하면서도 약간의 쿨한 평가를 덧붙이는 것은, 지나갔으나 다시 유행하는 복고풍 유행처럼 낯익은 행위이기도 하다(과거의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의 몇몇 소설들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실은 그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하다. 습관적인 기도처럼, 단어 자체가 기도가 되는 기도문처럼(광야를 헤매는 우리를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사...).
그렇다면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오직 표피적 장식물로 쓰이고 있는 그 성인들과 성서들의 이름들 사이에 섞여서, 이 영화의 주제들이 종종 거칠게 직접적으로 튀어나온다. 자유. 삶. 죽음. 툭툭 던져지는 주제와, 소재와, 색, 텍스트, 기행. 그런 것들의 거칠고 무심한듯한 콜라주를 보면서 '스타일' 너머에 묵직한 주제의식으로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비록 잉어먹이 주듯이 무심하게 마구잡이로 던진 것 같기는 했으나 적어도 기도를 위한 기도는 아닌 것이다.
VIE
프랑스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나조차도 의미를 알게 된 단어. 그들이 얼마나 '삶'이란 것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치광이 피에로>의 최종적인 메시지는 '삶'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처럼 모든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이다. 페르디낭이 어느날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마리안느와 모험을 시작하는 것은 왜일까. 공기가 부족해질 때 호흡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처럼, '삶'이란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 건 언제나 '죽음(mort)'의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쓸데없는 대화만 나누는 '바보'들의 파티에서 페르디낭은 죽음을 인식한다. 무용한 대화만 하는 공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지 않은 곳. 소통하지도, 협력하지 않는 몸들. 그에게 죽음이란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것이다. 오로지 살아있는 사람만이 무언가를 원할 수 있다(또한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죽음이기도 하다. 그가 마리안느와 어딘가로 떠나는 날 밤하늘에 터지는 폭죽-그것은 아마도 폭탄과 전쟁의 암시-베트남 전쟁이 어디선가 한창이다. 네이팜과 죽음. 멀리서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들).
자유. 죽음만이 보이는 세계에서 탈출한 페르디낭과 마리안느는 자유를 누린다.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훔쳐서 돈을 얻고 근사한 차를 몰고는 세상의 끝처럼 보이는 해변으로 간다. 그리고 차를 몰아 바다에 처박고는 짐을 들고나와 그곳에서 산다. 바다. 파도. 하늘. 죽음이 가득했던 곳에서 탈출한 그와 마리안느는 이제 '자유'라는 '삶'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자유가 가득한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사랑이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러나 마리안느는 해변을 걸으며 외친다. 종착역이라 생각한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자유처럼 보이는 공허한 무언가였다. 햇빛도, 바다도, 모래도 다 지겹다. 같은 옷을 매일 입는 것도. 자유처럼 보였던 그것은 정말로 '삶'이었을까? 페르디낭은 적는다. 우리는 휴가중인 시체. 자유란 휴가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삶'은 아닌 것이다. 자유는 획득하는 그 순간만 '삶'일 수 있다. 10분 전까지 죽음이 가득했던 세계에서 탈출하는 그 순간. 그러나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어디선가 죽음의 소식이 들려온다. 불타는 성냥개비와 손으로 만든 가짜 비행기. 물 위에 붙은 불. 네이팜탄에 죽어가는 베트남 사람들. 그들은 또 어디론가 떠난다. 종착역처럼 여겨졌던 해변을 떠나서.
이제 그들의 여행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멋진 차를 타고 자유를 찾아 능동적으로 떠나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여행이, 실은 자신들을 쫓아오는 죽음의 신으로부터 쫓겨 허겁지겁 도망치는 수동적인 피난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도망치고 있었다. 죽음을 따돌리기 위해서 어디론가 내몰리고 있었다. 그들을 쫓아오는 죽음이란 것은 더이상 대화의 단절과 외로움 따위의 고독한 것들이 아니다. 총과 돈과 배신과 피, 그리고 최후에 머리에 휘감는 다이너마이트로 다가오는 직접적인 죽음들이다. 마리안느가 들려줬던 이야기처럼, 죽음의 신을 마침내 따돌렸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마리안느, 그리고 페르디낭은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죽음 후에 그들은 진정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삶과 자유. 그리고 죽음. 그 다음에 있는 것은 영원. 바다와 태양.
CINEMA
영화 초반 파티에서 만난 미국인 영화감독이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그것은 전장, 사랑, 증오, 액션, 폭력, 죽음. 한마디로 감정. <미치광이 피에로>는 스스로를 영화라고 증명하듯 그 모든 것들을 다 담아냈다. 주제와 서사 사이의 촌스러운 연결을 피하기 위해 있는 것은 스타일이다. 콜라주처럼 툭툭 붙여놓은 '소설적' 발화들과 인물들의 행동, 베트남 전쟁이라는 원경. 그리하여 영화는 성공했을까? 메시지를 무사히 전달하는 것에? 혹은 전달될 수 없는 메시지를 노출시키는 것에? 그것도 아니라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그 '감정'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을?
글쎄. 나는 수많은 모조품을 양산해낸 첫 번째 혁명의 부질없음을 새삼 생각한다. 콜라주라는 기법이, 무심하게 덕지덕지 붙인 사물들 사이에서 '전달'이 아니라 '노출'되는 어떤 전언들이 세련되었던 시절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그것이 과거의 꽉 막힌 예술적 질서를 뚫는 그 첫 순간에는. 그러나 '자유'가 그것을 획득하는 그 순간만 '삶'일 수 있는 것처럼, '예술로서의 콜라주'의 아류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새삼 마주하는 그것은 과연 진정한 '자유' 혹은 '혁명'일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공허한 '휴식'처럼 보였다. <네 멋대로 해라>를 보았을 때의 그 신선함조차 없이, 거의 별다를 것 없는 서사와 분위기를 다시 한 번 컬러로 반복하는 그것이. 종교적인 공감법에 기대어, 메타텍스트라는 알리바이에 기대어, 소통 없이 나열될 뿐인 그 러프한 예술적 소재들을 보며 나는 그 근사한 끄덕임으로 동조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 순 없었다. 죽음! 삶! 자유! 내겐 그것들이 깊은 지하철을 따라 마침내 올라온 입구에서 마주친 '예수천국! 불신지옥!' 글귀처럼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다가올 뿐이었다. 그래서 비록 근사하진 않더라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