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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Jul 13. 2019

[영화] 롱샷

'화이트 코미디'

Long Shot 2019 - 조나단 레빈





3년 전 <주토피아>를 봤었다. 



현대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어떤 윤리적 감수성이 애니메이션 안에 무척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었다. 다양한 시점(동물)의 삶이 나왔고, 그 시점들(작은 쥐들의 세계부터 커다란 기린의 세계까지)은 서로에게 조심스러우면서도 매력적으로 공존하며 흥미진진한 서사를 타고 입체적인 세계를 구성했다. 그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주디와 닉의 모험에서 드러나는 윤리적 감수성은 작 중 등장한 아이폰만큼이나 세련되었던 기억이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사실 요즘은 꼭 대상이 아이들만은 아니겠지만)이라고 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영화 <롱샷>은 꽤나 본격적으로 윤리를 다룬다. 일단 영화의 시작부터가 백인우월주의의 현장을 취재하는 프레드의 유쾌한 잠입취재 액션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인종차별(주로 흑인) 문제, 여성차별 문제, 환경문제, 종교 문제, 정치 비리 문제까지, 미국 사회에서 상상할 수 있는 현재진행중인 윤리적 문제를 총집합시켜서 프레드와 샬롯 두 사람의 이야기 안에 모조리 집어넣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양한 문제들이 겨우 두 사람의 서사, 즉 대선후보와 연설문 작가의 서사 안에 꽤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직업적인 특징과 주변인들로 인해서 그러한 문제들은 억지스럽지 않게, 그리고 특유의 재치있는 유머로 유쾌하게 다뤄진다. 사건도, 갈등도 어색하지 않았다. 하나의 문제만 다뤄도 그것이 두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와 엮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다양한 문제들이 개연적인 충돌 없이 능숙하고 매끄럽게 등장하는 것을 보며 이 영화가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게다가 코미디니까, 괜히 무게 잡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런데 <주토피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어떤 불편함이, <롱샷>의 이 유쾌한 진행 중간중간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코미디를 코미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 것일까? 조던 필의 자학적인 인종 개그를 괜히 쓸데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인종적 편견이라며 태클을 거는 것처럼? 


이 기묘한 불편함의 정체를, 나는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간신히 눈치챘다. 이 영화가 서사의 하이라이트에서 제시한 가장 중요한 딜레마, 그러니까 프레드의 자위 영상의 배포와 샬롯의 정치적 신념을 두고 저울질하게 만드는 그 선택의 문제와, 영화가 결국 선택한 어떤 길에서 말이다. 


화이트 코미디


샬롯이 자신이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정치적 신념(환경보호)을 굽히지 않으면, 애인인 프레드의 자위영상이 인터넷에 뿌려질 것이고, 대통령이 되려는 자신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것이다. 만약 신념을 굽혀 대통령과 결탁한 웸블리의 벌목권을 인정한다면, 생태계의 파괴를 묵인하게 될 것이고 프레드가 자신에게 실망하여 떠나갈 것이다. 


얼핏 이 영화의 주인공인 '샬롯'의 몫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 딜레마에는 사실 전혀 다른 인물의 핵심적인 딜레마가 숨어 있다. 그 딜레마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이 영화의 진짜 (단독)주인공인 '프레드'의 것이다. 


벌목권과 관련한 딜레마를 프레드의 것으로 끌어들여온다면 문제는 이렇게 바뀐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오랜 꿈(대통령)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야만 현실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일들을 위해서, 고집스럽게 유지해오던 자신의 오랜 비타협적인 정치적 신념을 꺾고 타협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샬롯의 선택이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그녀가 다른 하나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많은 인기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것은 애초에 이 딜레마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샬롯이 자신의 꿈(대통령)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프레드에게 달려갔을 때, 프레드 역시 자신의 고집스러운 비타협적 신념을 돌아보며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게 되는 '스스로의 성장'과, 애인인 샬롯, 그리고 마지막엔 그녀의 꿈까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얻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자위 영상이 인터넷에 뿌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런' 저항의식이 없었다. 그에게 진짜로 포기해야할 무엇이란, 샬롯을 통해 이루어질 자신의 정치적 신념 하나 뿐이었다. 실은 그것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꿈이 아니라, 그 자신의 꿈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실은 비타협적인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어떻게 다루며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프레드의 '성장 영화'다. 그는  무척이나 고집불통인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은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조금씩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며 성장해왔다(면접, 연설문누락, 자위영상협박, 보수 흑인 친구 랜스). 


두 명의 주인공이라는 전제를 벗어던지고, 프레드라는 인물을 단독 주인공이라고 인식하며 영화 전체를 보게 된다면 모든 것들이 선명해진다. 그를 중심으로 기분좋게 주변에 '적절하게' 배치된 다양한 인종적, 성별적 밸런스와, 특정한 주체의 자리를 정해놓고 주변으로 발산하는 '대상적 유머들'.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쾌한 유머들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특정한 주체의 자리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유머의 대상이 되는 인종적, 정치적 대상들에는 물론 프레드 그 자신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프레드 자신을 향한 유머는 '바람막이 입은 감자'로 표현되는 그의 '너드적 외양'을 다루는 것이지 결코 그의 '진보적 백인 남성 주체'를 향하지는 않는다(사실 그 유머는 풍자라기보단 프레드란 캐릭터의 '신데렐라적 조건'을 강화시키는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샬롯이나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보수 크리스천 친구 랜스를 향한 유머처럼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쓸데없이 사족처럼 붙은 그 '그날'에 관한 지저분한 농담과 그들에 대한 응징(겨우 머리에 잔을 던진 것으로 만화처럼 응징되는, 그러나 굳이 진부하게 동원되어야했던 그 유머)도 '특정한 주체의 자리'에서라면 분명 꽤나 유쾌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주체의 특성이 유머의 대상이 되는 다른 '자리'들과 달리 이 '진보적 백인 남성 주체'의 자리가 관심있는 문제는 어떻게 시야를 반성적으로 넓혀서 주체의 성장을 얻어내는가에 대한 것일 뿐이다. 최후에 '아내의 성을 따르기까지한 최초의 영부군'이 된 프레드라는 백인 남성 주체는 스스로의 성장에 따른 매력적인 윤리성을 확보하였다. 또다른 주인공처럼 보였던 샬롯이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라기보다는 그저 '최초의 영부군의 아내'로 전락(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응하는 인터뷰에서 누구의 팔이 주도적으로 앞에 나와있는지, 누가 아무런 말 없이 원경으로 물러나 상대를 장식해주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하는 동안에. 


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코미디일 뿐인데 너무 무겁게 따지고 드는 것은 아니냐고. 그러나 이러한 윤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나온 것이 영화 <롱샷>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그러한 윤리적 문제들을 단순히 개그코드를 위한 소재로 썼을 뿐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최신 유행이고, 또 쓸데없이 진지한 면이 있으므로 풍자적으로 다루기에 무척 용이하다. 그리고 그랬을 경우 꽤 쿨하게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여러가지 유머들은 물론 유쾌한 것들이 많았다(주로 유효한 유머들은 초중반에 몰려 있긴 했지만). 단지 다양한 관점의 윤리를 다루는 것처럼 스스로 포지션을 잡아 놓고서는, 그 유머와 성장 서사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특정한 로얄 좌석을 은근히 배치해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지워내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진짜 쿨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뿐이다. 


반성과 성장의 기회는 결국 누구에게 주어졌을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과 관객은 결국 또 누구일까. 그것이 너무나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것이, 이 영화를 그저 깔깔 웃으면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무언가 바뀌었다면, 무언가 아픈 곳을 날카롭게 찔렀다면 멋진 블랙코미디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뀐 것은 없고, 날카로움 없이 익숙한 그 자리만 또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걸 '화이트 코미디' 정도로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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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이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샬롯이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던 것이 닭꼬치였나?). 그러나 인상에 딱히 남는 것은 없었다. 


- 남녀의 자리를 역전시켜본다고 해서 항상 유효한 관점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기계적인 함수를 '상상력'이라고 불러주기에는, 이미 그러한 방식이 너무나 많이 쓰였다. 그리고 바꾼다고 해서 뭔가 맞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역전된 무언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라는 생각이다. 


- '윤리'란 항상 다루기 껄끄러운 것이다. B급 중에는 이 윤리리라는 선 '위'에서 그것을 다루려는 B급이 있고, '밑'에서 다루려는 B급이 있다. 후자의 경우에 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자주 떠올린다. 전자의 경우에 그것에 성공한 경우는 그다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 샬롯은 왜 프레드를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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