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창립자다.
나는 비건 뷰티 브랜드 마케터이다. 그리고 창립자다.
■대기업 내의 신규 브랜드 기획과 운영의 고충 : 예산을 주던지, 기대를 말던지 둘 중 하나만 해라. 제발.
한 대기업에서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건, 나의 의지로 회사를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기업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면서 내가 원하는 브랜드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 보여줘야 한다. 브랜드가 망한다고 해서 월급이 끊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분명 스타트업 보다는 덜 간절할 수 있다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책임감이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대기업은 늘 효율을 최우선 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자도 정당히 요구할 수 없다. 나의 브랜드에 대한 비전을 보여줄 기회도 없다. 내가 만든 브랜드를 키우기 위한 예산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브랜드의 실적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심지어 매출도 아니고 이익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런 자본주의(나는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라고 말한다.)에서 예산 없이, 투자 없이 실적을 올릴 수 있을까? 어제까지 많이 팔리던 제품도, 하루만 광고를 안해도 실적이 떨어진다. 더구나 과거와는 다르게 제조사는 유통사에 "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광고비를 투입하지 않으면, 유통사는 철저히 제조사를 배제한다. 정말 철저하게 배제한다.
사실 브랜드가 망해도 내 월급이 깎이지는 않는다. 평판을 걱정할 수는 있겠으나, 사실 그것도 생각보다 크리티컬하진 않다. 왜냐하면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나를 보여줬고, 그것을 통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브랜드가 잘된다고 스타트업처럼 스톡옵션을 얻는 것도 아니고,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처럼 연봉의 40~50%의 인센티브가 들어오지도 않는다. 40만원 이라도 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성공시키고 싶은 내 브랜드
이렇게 잘 못되도 상관없고, 잘 되어도 상관없는 상황에서 열정적으로 근무 외 시간까지 투자해가면서 브랜드를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만든"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정체성을 담은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 잘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처럼 나는 내 브랜드를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이번 설 연휴 동안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면 나의 브랜드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키우면서, 나의 정체성을 담으면서, 투자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방법론적인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근본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 브랜드는 진실한가? 진정성이 있는가? 언행이 일치하는 브랜드인가?" 나는 늘 진정성을 제1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브랜드를 운영하고자 했다. 그것이 팔기 위한 광고가 아닌, 브랜드의 정체성을 말하는 진짜 마케팅의 가장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대기업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활동들은 제한적이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그렇다. 그리고 이건 분명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진실한가?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소비를 통해서 기술과 사회가 발전해야 한다. 유혹해서 소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회사와 브랜드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소비자들의 주머니로부터 번 돈으로 이미지 개선용 CSR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순간부터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브랜드는 비건이다. 소비자가 나의 브랜드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1차적으로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을, 더 나아가 환경을 보호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 지금 나는 부끄럽다.
사실 비건 뷰티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하는 나는 비건이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 어제까지는 말이다. 사실 동물 복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환경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알아야 할 것 같지만, 애써 책상 한구석에 두고 못 본척했다.
나의 브랜드를 통해서 애써 외면했던 곳을 이제서야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브랜드를 만들고 성장시킨다고 말하지만, 이번엔 브랜드가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
■이후 이야기
앞으로 글을 통해 브랜드와 나의 비건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성장기이자, 브랜드의 성장기가 될 것 같다. 나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