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고2 겨울, 나는 선화여고 교정을 헤매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자 면접을 보기 위해 강화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먼 길을 왔건만, 담임 선생님의 실수로 다른 학교로 갔다가 늦어버렸다. 당시엔 핸드폰도 흔치 않던 시절이고, 내 수중엔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쥐어져 있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근처 경찰서를 찾아 들어갔다. 뛰어서 땀범벅이 된 모습으로 사정 설명을 했고, 학교에 전화를 걸어 면접 장소를 다시 받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 택시를 타면 만원이 나오는 거리. 돈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어째야 하나 울음이 터지기 직전인 내게, 내 사정을 듣고 있던 어느 경찰관 아저씨가 내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며 말했다.
“ 택시 불러줄게. 타고 가. 이 돈 그냥 주는 거 아니야. 면접 잘 보고 오라고 주는 거야. ”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안에서 눈물을 닦으며 아직 늦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마음을 다 잡았다. 선화여고 앞에서 내린 순간, 또 한 번 심장이 철렁했다. 학교가 너무 컸다. 건물이 여러 채인데, 안내문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또 뛰기 시작했다.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뛰어다니다 갈림길에서 주저앉았다.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던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다.
“ 학생, 어디 찾아? ”
“ ○○전자 면접 보러 왔는데, 건물을 못 찾겠어요. 도와주세요. ”
“ 내가 그쪽으로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되겠네. ”
그 학교 선생님인 듯 보이는 남자를 따라 걸었다. 남자는 어디서 왔는지, 면접은 어떻게 보게 됐는지, 왜 늦었는지 등을 물었다. 그때의 내가 순진했던 건지, 왜 묻는지 의심도 없이 낯선 그 남자에게 심드렁한 말투로 주절거리며 말했다.
“ 강화에서 왔어요. 담임 선생님이 다른 학교를 알려줘서 찾아오느라 늦었어요. 형편이 안 좋아 대학에 못 갈 것 같아서 취업하려고요. ”
몇 마디 대화 나누는 사이에 면접장에 도착했고, 난 또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뛰어 들어갔다. 이미 면접은 진행 중이었지만, 아직 내 차례까지는 오지 않았다. 안도의 한 숨을 한 번 내쉬고, 산발이 된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드디어 내 차례, 면접 보러 온 다른 친구들과 함께 면접장으로 들어가 앉았다. 고개를 들다가 헛숨을 삼켰다. 면접관과 눈이 마주쳤는데, 아까 길을 알려줬던 그 남자였다. 그 남자, 아니 면접관은 날 보며 빙긋 웃었다. 난 아까 내가 오면서 주절거린 말들이 뭐였는지 생각하느라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했다. 면접관에게 이미 내 얘기를 주절거린 터라, 거짓말하기도 뭐해서 면접관의 질문에 있는 그대로 오는 길에 했던 얘기를 한번 더 되풀이했다. 그때 내가 든 생각은 ‘망했구나’였다. 면접이 망한 것만 빼면 돌아오는 길은 순탄했다.
그날의 내 사정을 들은 아빠는 만원을 주며, 경찰 아저씨에게 다녀오도록 시켰다. 난 박카스 한 박스를 사들고 다시 경찰서를 찾았지만, 그날 비번이었던 아저씨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 후로 뜀박질만 죽도록 한 망한 면접 따위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대학을 못 가니 다른 길을 찾기 위해 본 면접이었다. 그 면접에 붙으면 용인에 있는 ○○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3교대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공순이라고 불렀다. 공순이가 되는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슬플 리 없었다. 대학에 못 보내준다는 아빠의 말에 반감을 크게 갖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면접에 붙으면 공순이는 될지언정 집에서 나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그 이듬해 봄, 학교로 화분 배달이 왔다.
‘ ○○전자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
합격 소식은 순식간에 전교에 퍼졌다. 선생님들은 축하를 건넸고,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염려와 걱정의 말을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때의 나는 기쁨도 슬픔도 없이, 무덤덤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대학도 못 갈 거 돈이나 벌자는 마음과 ‘ 왜 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들 다가는 대학도 못 가나’하는 좌절된 마음이 뒤엉켜 있었다. ○○전자의 합격으로 나는 공부와 멀어졌다. 내내 상위권을 맴돌던 내 성적은 바닥을 쳤고, 고3 내내 ○○전자 입사를 기다리며 커피숍 알바를 하며 지냈다. 시간은 내 상처 난 마음과는 다르게 무심히 흘렀다. 수능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전자 합격이 취소가 되었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난 1년 동안 무얼 한 것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난 웃음을 잃어갔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방황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만났다. 겉보기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머릿속은 늘 시끄러웠다.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가끔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혼란을 덜어주진 못했다.
‘ 어떻게 살아야 하지? ’
‘ 졸업하면 뭘 해야 하지? ’
머릿속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그때까지 나는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답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 방황의 늪에서 나를 끌어낼 수 있는 건 결국 나뿐이잖아. ’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나를 버릴 수 있을 만큼 용기 있지 않았다.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왕 살아야 한다면 적어도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고 싶었다. 그때부터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 대학 못 간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야. ’
‘ 대학 못 간다고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
‘ 꼭 대학이 아니어도 공부는 계속할 수 있어. ’
‘ 친구들이 공부하는 동안 나는 돈을 벌자. 대학은 1년 뒤에도 갈 수 있어. ’
나는 고2 때까지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었다. 방황은 고3인 1년 동안 넘치게 했다. 세상살이는 공부가 다가 아닌데, 그때는 공부가 다인 줄 알았다. 내 안의 틀을 깨고 나오면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사실을 이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 인생에서 공부 말고, 다른 새로운 생각들을 하고 깨달으면서 변화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 내 인생의 방향키는 내가 잡고 있다. ’
생각이 달라지자 상황은 변한 게 없는데, 내가 변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대학에 갈 수 없었고, 앞으로의 길도 막막했지만, 적어도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결국 내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