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버티는 힘에 대하여.

그 시절, 나를 붙잡아준 것들.

by 서진

이야기는 어느새 내 인생의 중반을 지났다. 그 시절을 되짚어가며 글을 쓰다 보니,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때의 감정들로 때론 고통스럽기도 하다.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걸려 있던 응어리들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가장 큰 감정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내 안에서 많이 풀어졌다. 문득 다른 사람들의 20대도 이렇게 약하고 흔들리며 단단해졌을까 궁금해진다. 단단해졌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텨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지난한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낸 것일까 생각해 본다.


버티는 힘 하나.

세무사 사무실 특성상, 3월의 법인세와 5월의 종합소득세가 끝나고 나면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지금이야 홈택스가 똑똑해져서 세무사들을 위협하고 있지만, 그땐 홈택스가 막 도입되던 시기라 수작업이 더 많았다. 그러니 신고기간에 정시에 퇴근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신고가 끝나면 달콤한 휴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한가해지는 시기가 오면 오히려 현실이 더 버겁게 느껴졌다. 바쁠 땐 일에 쫓겨 힘든 것도 잊고 살다가, 퍼뜩 내 상황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책을 한 아름 싸들고 방구석으로 도망쳤다. 아니, 책 속으로 도망쳤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그 시절엔 자기 계발서는 읽지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든데, 나를 더 몰아세우는 것 같은 책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대신 현실도피로 제격인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로 숨어들었다. 아예 다른 세계로 도망쳐 내가 주인공인 양 책 속에서 살았다. 역경을 헤치고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나에게도 언젠가 해피엔딩이 오겠지’하는 희망을 품고 책을 덮었다. 그렇게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내가 견뎌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세상을 버텨낼 힘이 부족했고, 마음은 쉽게 부서졌다.


버티는 힘 둘.

그래도 다행히 나를 알아봐 주는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 우리는 단짝이었다. 늘 붙어 다니며 모든 걸 함께했지만,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20대 중반쯤이었다. 우리는 언제 멀어졌었냐는 듯 그 시절 단짝으로 돌아갔다. 일주일이 끝나는 금요일이면 구석진 술집에서 어김없이 그녀를 만났다. 골뱅이에 소주 한잔 시켜놓고, 우리는 그저 함께 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웃는 그녀는 언제나 지친 나를 들어주고, 도닥였다.


“ 너 진짜 잘하고 있는 거야 ”


친구의 그 한마디가 내 하루를 버티게 했다. 특별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곁에 있음’의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단지 마음의 짐을 누군가와 함께 짊어진다는 생각만으로 힘이 되는 건 아닐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누군가 내 곁에서 같이 걷고 있다는 믿음, 그것만으로도 이미 크나큰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친구가 별로 없다. 여러 방면의 문어발식 인간관계를 선호하지 않아서이다. 깊지 않은 관계를 위해 시간을 들여서 만나고, 감정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훅하고 선을 넘어버리는 사람들을 웃으며 대할 여유가 아직 없어서이기도 하다. 대신 한번 깊게 엮인 인연은 오래간다. ‘진정한 친구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시절 나를 위로했던 그녀는 지금도 내 옆에 있다. 아마도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 같이 노인정 가는 날까지 함께이지 않을까 싶다.


버티는 힘 셋.

가끔은, 도망칠 곳 하나만 있어도 사람은 버틸 수 있다. 내게 그곳은 절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치이고 지칠 때면, 절을 찾았다. 마음이 시끄러울수록, 조용한 곳에서 나를 챙길 시간이 필요했다. 어수선한 생각들을 떨쳐내고 싶을 때면, 법당에 들어가 허벅지에 알이 배기도록 절을 했다 108배가 끝나면, 법당 구석에 망가진 인형처럼 앉아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부처님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그날의 내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 보였다. 내가 원망 섞인 기도를 쏟아 낼 때는 한없이 자비로운 미소로 안아주는 듯했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는 엄하게 꾸짖는 표정으로 세상 속으로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부처님과 눈싸움하며, 눈물로 조각났던 마음들을 조금씩 이어 붙였다. 절은 말없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사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불교라고 서슴없이 답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을 때 의례 그러하듯이 난 그때 의지처가 필요했고 외로웠다. 그리고 절이라는 공간에 끌렸다. 처마 밑으로 부는 바람, 그 바람에 울리는 풍경소리, 향 냄새가 숨처럼 따라오는 곳. 고요한 그곳에 나를 조용히 내려놓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마음이 고단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다면, 다시 살아갈 힘도 생긴다.


버티는 힘 넷.

김연아 선수가 선수 시절, 무슨 생각하면서 스트레칭하냐는 질문에 ‘그냥 하는 거죠’라고 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는 그 영상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그 시절의 나도 그렇게 버텼다는 것을. ‘하면 된다’의 힘을 나도 모르게 체득한 게 아닐까.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두 손 놓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리고 세무사사무실에서 공부해 가며 일했던 시간은 내게 분명한 확신 하나를 남겼다.


‘마음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건 분명 어제의 나보다 더 성장한 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그 시간들이 나를 붙잡아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물론 지금의 나라고 해서 문제가 생기면 덜 흔들리는 건 아니다. 여전히 고민하고 방황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렇게 흔들리고 넘어지며 해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곧 성장의 시간이라는 것을.


자신을 다 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오만이다. 새로운 상황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지, 그건 나 조차도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알 수 있는 건, 다시 시련이 온다 해도 방황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찾아내고, 또 그만큼 성장해 나가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복잡하게 묻지 않고 그냥 한다. 그게 어제의 나를 이기고, 내일의 나를 부르는 방식이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를 증명하려던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