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어디까지 인간을 치유하는가, 영화 <햄넷>

by ays

*영화 <햄넷>에 대한 주요 내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장소를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질문에 그 어떤 망설임없이 나는 라이카시네마를 꼽았다. 내 영혼이 가장 오래 머문 곳. (물리적으로는 아닐지언정, 심리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불안함이 잔존할 때면 발걸음은 언제나 라이카로 향했다. 라이카가 아닐 때도 있었다. 광화문 씨네큐브. 시간이 뜨면 무작정 근처 쿠차라에 가서 밥을 먹으며 가장 가까운 영화를 예매했다. 모든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면 그제서야 온전해 지는 기분이었다. 예술 때문에 괴로웠지만 오직 예술만이 나를 위로했다. 영화 <햄넷>이 또다시 그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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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전 부터 기다린 영화다. <노매드랜드>로 세상을 놀라게 만든 클로이 감독의 신작이다. 사실 <햄넷>의 명성은 북미에서 개봉했을 시점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클로이 자오의 역작이라며 입을 모았고, 영화의 나노 단위는 발췌되어 인스타그램, 틱톡을 지배했다. 이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영화의 모든 주요 장면을 인지한 채로 영화관에 들어섰지만, 영화 <햄넷>은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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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가 되기 전, 윌리엄으로 살았던 그의 삶을 조명한다. 사실 셰익스피어 보다도 더 중요한 건 그의 아내 아녜스다. 아녜스는 마을에서 '마녀'로 통하는 인물이다. 손을 만지면 타인의 미래를 보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약초를 캐며 주문을 외우고 매를 키운다. 그녀는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윌리엄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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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지 못한다. 창작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밑에서 생계를 위해 노동하던 윌리엄은 점점 지쳐간다. 그녀는 결국 남편을 다른 곳으로 보내주고, 아이들과 함께 삶을 꾸려 나간다. 겉보기엔 큰 문제 없이 살아가는 듯한 그녀에게도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이 어릴 때 부터 지니고 있던 예언이다. 세 명의 아이 중 한 명의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가장 몸이 약한 주디스를 잃을까 정성껏 돌본다. 그 사이 윌리엄은 희곡을 쓰며 런던에서 '셰익스피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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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이별을 견딜 수 없다. 막내 햄넷은 아버지를 보내고 홀로 괴로워한다. 햄넷의 앞에 어머니 아녜스가 나타나 햄넷의 미래를 봐준다. 그녀는 "너와 아버지가 함께 일을 하고 있으며, 너는 멋진 청년이 되었다."라고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한다. 과연 그들의 미래는 정말 그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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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는 아들을 떠나 보내고도 곧바로 일을 위해 런던으로 떠난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 동생과 함께 런던으로 떠나 남편의 연극을 보러 처음 공연장에 들어섰지만, 그곳은 완전히 외딴 세상이다. 자신의 아들과 닮은 이름을 가진 이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펼치고, 아녜스는 분노한다. 그러나, 점점 셰익스피어가 만든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무대 위의 대사는 윌리엄과 아녜스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리고, 햄넷과 너무나도 닮은 청년이 등장하여 연기를 펼친다. 아녜스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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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절정. 햄릿은 열정적인 연기를 해내며 죽음으로 향한다. 그가 극 속에서의 죽음을 목전에 앞 둔 순간, 아녜스가 햄릿에게 손을 건넨다. 그의 눈엔 당황에 서린다. 그것을 본 관객들이 하나 둘 '햄릿'에게 손을 건넨다. 예상치 못한 위로의 손길을 받은 배우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그 속에 아녜스가 있다. 그녀는 이제서야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 자신이 본 것, 자신이 보고 있는 것. 자신이 보내주어야만 하는 것. 눈 앞을 스쳐가던 검은 구멍은 어둠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가는 통로였을 뿐. 그제야 햄넷은 먼 길을 떠나고, 그 순간 예술은 절망의 늪에서 아녜스를 구원한다. 그리고, 연극을 감상하는 관객들 역시 그 구원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들은 아녜스를 모른다. 그들은 아녜스의 이야기를 모른다. 다만, 그들은 함께 울고 웃는다.




자신조차도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직면하는 것. 내가 가진 상처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관객에게 내보이는 것. 영화 <햄넷>, 아니 예술이 위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연극은 '극'이지만 그 어디에도 가짜는 없다. 아녜스에게 있어 그녀가 본 것은 진짜다. 어린 햄넷이 장성해서 무대에 올랐고, 남편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홀로 상처를 감내할 때 그것은 고통이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작품이 되자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입고 또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그럼으로써 존재하고 그럼으로써 옅어지는 상처. 영화 <햄넷>의 윌리엄은 그런 방식으로 햄넷을 추모하고,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햄넷을 기억하게 된다. 예술은 그렇게 한 인간을 치유한다.



글을 마무리 하며, 영화 <햄넷>으로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의 스피치를 덧붙인다.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만큼 충분히 취약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온전히 세상에 내어주는 것, 부끄럽거나 두렵고, 완벽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그래야 우리가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들 역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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