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서

끝내주는 연차를 위한 신입사원의 여정

by 박찬란


'나만의 작은 숲은 어딜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며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주인공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의도가 짐작이 가지 않아 찝찝함이 남고, 로맨틱 코드에 울고 웃는 전형적인 한국형 감성의 소유자에겐 보일락 말락한 러브라인이 아쉬움을 주었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 묘사된 전원의 풍경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소박한 일상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일컫는 '힐링'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모습에 매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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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포레스트(2018, 임순례 감독)」는 임용고시에 낙방한 혜원이 도망치듯 어린시절을 보낸 집으로 가서 벌어지는 일들을 잔잔하게 그려낸 영화다. 아무도 모르게 쉬다가 갈 요량으로 시골집으로 간 혜원의 뜻과는 달리 추억 속 인물들이 익숙하게, 때로는 새롭게 그녀의 일상에 스며들며 회색빛 하루하루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마침 고민으로 머리가 가득 차있던 시기의 나였기에 혜원에 빙의하여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지만, 천국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 뜨거운 지옥에서 벗어나 조금은 따뜻한 느낌정도의 지옥이라도 괜찮았다. 그저 집과 회사만 반복하며 소진되어가는 일상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학생 때는 이렇게 힘들어 죽겠다 싶을 때 즈음 방학이라도 있어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면, 회사원이 된 나에겐 '연차'가 허락되었다. 다 모아서 써도 방학의 반도 되지 않으며, 그마저도 눈치가 보여 초콜렛 아껴먹듯 쪼개 써야하는 나의 소중한 연차. 나는 이 연차를 통해 숨막히는 일상에 숨구멍을 만들기로 했다. 마치 혜원이 그러했듯 말이다. 그것이 나의 첫 연차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냅다 연차는 써봤지만 방안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평소 같으면 치열하게 사투 중일 시간에 멍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꽤나 만족스럽긴 했지만 물가에 아이를 두고 온 것 마냥 다음 날로 미루고 못다한 업무가 계속 생각이 나 연신 회사 메신저를 들락 날락했다. 덕분에 메신저에 '접속 중'이라는 뜻의 초록불이 켜지니 사람들은 상태 메시지의 연차라는 단어를 무시하고 직진 신호라도 받은 듯 미친듯이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딘가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나의 첫 연차가 허무하게 지나갔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첫 연차를 떠나보내며 그저 분할 뿐이었다.

'노는 것도 놀아본 놈이 더 잘 논다더니, 연차에도 일을 하는 꼴이라니. 다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모두가 부러워하는 환상적인 연차를 보내야지. 열심히 쉬어보자.'


분명 유희와 여가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쉼에 '열심히'라는 말도 안되는 단어를 갖다 붙이면서까지 나는 연차를 잘 보내는 일에 진심이 되었다. 모름지기 어떠한 일에 통달하기 위해선 그 일의 왕도를 깨우친 누군가를 견본 삼아 흉내내는 것이 가장 빠른 것이 아닐까. 그 순간 기억 속에 잊혀져 갔던 자신만의 작은 숲을 일궈낸 혜원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제발, 너의 비결을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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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골집으로의 도망 이후 혜원이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하필이면 요리였다. 언 땅 속 깊숙이 잠든 배추를 파내어 푹 고아 끓인 배추 된장국, 차가운 바람을 안주 삼아 담가 먹은 동동주, 그리움을 머금고 자란 토마토. 혜원의 추억으로 빚어진 음식들은 다시 혜원에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온기를 불어 넣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의 요리 실력은 지친 일상에 생기를 불어 넣기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에, 훌륭한 요리 솜씨를 가진 사람이 차려준 음식을 먹기로 결심했다. 두 번째 연차였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오후 2시에 미리 예약한 주택가에 위치한 한산한 양식집을 찾았다. 화덕피자로 유명한 곳이지만 가성비 좋게 부채살 스테이크를 파는 곳이었다. 여기서 느긋하게 고기를 썰고 있자니 기분이 퍽 좋았다. 창가 주변을 감싸던 아이비에 걸린 햇살과 단조로운 줄무늬 가장자리로 점잖게 누워있던 접시도 나와 함께 한낮의 여유를 만끽했다. 백일몽 같은 시간이었다.


꿈에서 깨어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리가 나오고 15분 즈음 지난 후였을까. 슬슬 배가 불러왔고, 허공을 응시하며 멍하게 있던 나의 머릿속이 어느순간 다양한 목소리로 채워졌다.


' 그래서 여기 다음엔 어디로 가지? 카페? 가서 뭐하지. 할게 없으니 재택프로그램으로 접속해서 저번에 다 정리하지 못한 메뉴얼을 완성해볼까.'

'아, 이 좋은 곳에 나 혼자 오니까 뭔가 재미없다.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은 일하고 뭔가를 하면서 앞서 나가고 있겠지.'


누구 하나 내쫓은 사람 없는데 쫓기듯 레스토랑을 나온 나는 홀린듯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다음 날이 밝아 출근을 한 뒤였다. 끔찍한 요리실력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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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밖에 없는 하루하루를 벗어나기 위한 두 차례의 소소한 반란이 회사생활에 찌들어버린 몸과 정신에 의해 진압되고 난 후 세 번째 연차엔 정말 물리적으로 회사로부터 도망갔다. 혜원이 자신만의 작은 숲을 찾아가는 모험 역시 결국은 자신이 나고 자란 집으로 향하며 시작되었다. 그런 혜원을 따라, 무작정 도망치고 싶은 원초적 본능을 따라 연차를 올리고 본가로 달려갔다.


이미 몇 번의 이사를 거쳤기에 이제는 유년기를 보낸 추억은 남아 있지 않은 공간. 나무로 된 마루와 문틀과 옹기종기 채소가 모여있는 텃밭, 빨빨거리며 쫓아오며 꼬순내를 풍기는 귀여운 똥강아지를 시멘트 바른 차가운 벽과 어렵사리 생기를 유지하며 고개를 쳐들고 있는 고무나무 화분들, 그리고 어머니의 취향껏 사둔 두어개의 인형이 대신하는 공간. 할 줄 아는 요리도 없고, 평소에 즐기던 취미활동도 하기 어려운 곳. 본가는 그런 곳이었다.


부모님에게 말도 없이 본가를 찾아 놓고 연락은 뒤로한 채 거실 소파에서 단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천하의 천덕꾸러기 막내 신입사원에서 선물처럼 찾아온 공주님이 되어 있었다. 급격한 신분상승에 놀랄 겨를 도 없이 달근하게 조리고 홍고추로 멋을 낸 두부조림과 아삭한 콩나물무침, 보드라운 달걀찜으로 허기진 속을 달랬다. 회사에선 반 공기만 먹어도 턱 막혀오던 목구멍이 보상심리라도 발동한건지 무서운 속도로 두 공기의 쌀밥까지 넘겨냈다. 공주는 식사를 마치고 자신을 키워낸 이들과 언제가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어색한 대화를 나눈 뒤 돌아오지도 않는 공주를 위해 마련된 방 한 칸에서 다시 잠을 청했다. 처음 보는 이불과 침대였지만 포근한 향이 공주를 감쌌고 공주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이따금의 산책을 제외하면 본가에 온 첫 날과 이어진 이틀의 주말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쉬어보겠다고 발버둥치던 연차들과는 사뭇 달랐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본가의 모든 것이 기약도 바라는 것도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공주였고, 사랑받았고, 따뜻한 음식과 관심으로 여전히 보살핌을 받았다.


3일 간의 휴식이 마무리 될 때 즈음, 사회생활에 정신없이 휘청이던 나는 뭔가 어딘가 단단한 버팀목을 딛고 서있는 듯 했다. 자괴감이 들 정도로 부족한 나, 혹은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아서 인정받지 못한 나라도 언제고 나무처럼 한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 것들이 있었다. 단지 너무 당연히 그곳에 있어서 이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는 줄도 모르고 너무 먼 곳에서 애써 휴식을 찾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실 만으로도 이제 당분간은 어떤 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이후 충전이 필요하다고 느끼거나 회사에서의 내일이 두려워질 때면 지체없이 본가로 도망가곤 한다. 누가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 하지만 작은 숲 하나 정도는 있으니 말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끝내주는 연차를 보내기 위해 나만의 작은 숲을 찾고 있다면 제발 멀리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곳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연인일 수도, 혹은 자신의 꿈을 담은 공간일 수도, 아니면 그저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작은 앨범일 수도 있다. 혜원에겐 자신을 키워낸 음식과 엄마와의 추억이 가득한 옛날 시골 집이었던 것 처럼 말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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