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오늘. 이것은 너와 나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망설여진다. 기억의 끝, 그 꼬투리를 살살 당기면 후두둑 올이 풀리는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처럼, 이 이야기의 시작점을 단번에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결말은 알지만 그 시작은 어디서 부터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 시간을 역행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자, 나는 이제 우리가 헤어진 일 년 전 오늘을 이야기의 에필로그라고 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끝을 잡고 헝클어진 실을 감아보려 한다.
이 이야기의 끝은 의외로 간단하다. 소용돌이의 마침표는 비교적 짧고, 단순했기 때문이다. 일 년 전 비 오는 저녁,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녀를 본 순간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그 서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몸을 수구려 앉은 그녀. 마치 희망을 잃은 건지, 길을 잃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릎에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소용돌이를 뱅글뱅글 돌려 그렸다. 눅눅한 모래는 작은 골을 패고 작은 소를 만들더니, 소용돌이는 점점 커졌다. 그녀의 손으로 그릴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그녀는 멈췄다. 꾸욱.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바로 마침표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던 듯 싶다. 나는 점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말했고, 돌아갈 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도 했다. 그것이 그녀의 이유였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이야기의 마침표이기도 했고, 그녀와 나의 헤어짐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그건 내 존재조차 부정하는 암묵적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희미해지는 불완전한 소용돌이는 꾹 눌린 점으로 끊어졌다.
그녀는 두 눈을 잃고 있어.
행방불명이었던 그녀를 찾은 곳은 8차선 도로 건널목에서 였다. 휘청거리는 두 다리와 거무스름한 그녀의 얼굴은 길 건너편에서도 단박에 알아볼 수있었다. 제발 건너지마. 파란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 그녀는 들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두침침한 해저, 온몸으로 깊은 물의 압력을 받치고 있는 듯한 그녀가 안타까웠고, 그녀는 더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여 더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위를 보았지만, 하늘은 해저 깊은 울렁이는 오로라인 듯 멀기만 했다. 그녀는 이제 너무 많이 와 버렸어라며 절망했고, 돌아 갈 수 없는 길을 왔다고 했다. 혹시라도 나 때문이라고 말 할까봐 그녀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불안함의 끝.
마치 그녀를 둘러싼 현실들이 탈선한 폴라 익스프레스처럼 달리고 달려 알 수 없는 세계로 치닫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병실로 돌아왔을 땐,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내가 가져온 온갖 물건들은 변기안에 쳐 밖혀 있었고, 세면대는 깨진 거울 조각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모양의 슬리퍼 두 짝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날은 담당 의사와 약속을 잡은 날이었고, 수술의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 점점 잃게 됩니다. 현재 이 환자의 경우는 수술한 턱 부위가 이상을 보이면서, 안면 근육을 마비시키고, 신경과 연결된 조직들이 눌려 점차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행방불명이었다.
내가 그녀의 수술 날짜를 안 것은 그녀의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얼마 후였다. 왜 수술을 하고 싶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매끈한 턱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걸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니 턱은 그대로도 이뻐라는 말로는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만족하지 못하는 삶에 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쓴 고배의 잔을 마시고 시작한, 지긋 지긋한 재수 생활. 마치 어딘가에 자기도 모르는 다른 삶이 있을거란 느낌이 그녀를 미치게 한다고 했다. 그녀는 또 말했다. 선택에 대한 불만족은 언제나 다시 선택 할 수 있기를 갈망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후회없는 결심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의 결심은 자꾸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병원에서 가져온 수술 동의서에는 그녀의 서명이 휘갈겨져 있었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잘못 될 일이 없을거라는 그녀의 말은 비장하다 못해 오버하는 연극 배우의 대사같았다. "괜찮을 거야." 수술대 위에서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그녀는 괜찮을거야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듯 했다. 그 때 왜 나는 그녀를 위해 괜찮을거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가 그랬다. 삶의 결정적 순간에 만약 오른손 대신 왼손을 들었다면, 그녀는 어떤 삶의 굴레안일까 궁금했다고. 그러니까 오른손을 내려서 현실을 돌이키고 왼손을 들어본다면이라는 가정처럼 말이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마치 알기나 한다는 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마치 웃는 것과도 같이 보였다. 어떻게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그건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 아무래도 다 괜찮을거라고 말해 주는 일이었다.
수능 시험 직후의 번화가는 자유를 얻는 학생들의 천국이었다. 어딜가나 수능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고, 그 카페 구석진 자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친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등이 보이는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오백원짜리 동전을 빙그르 돌리며 여기에는 두개의 문이 있다고 했다. "자, 뒷 면이 나오면 난 대학에 붙는 것이고, 앞 면이 나오면 대학에 떨어지는거야. 이 동전이 뒷 면이라면, 나는 당장 병원에 갈꺼야. 왜냐구? 아, 그건 내가 붙으면 알려줄께."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할꺼냐고 묻는 그녀의 친구에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건 마치 이미 일어난 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하는 걱정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니? 마치 넌 대학에 떨어질 사람처럼 이야기 하냐며 면박을 주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정말 대학에 떨어진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동전을 공중에 던졌다. 그리고 동전은 그녀의 손바닥위로 안착했고, 다른 손바닥이 그 위를 덮었다. "두 개의 문이 있다고 했지? 이렇게 어느 쪽 손을 펼치느냐에 따라 동전 앞 면일 수도 있는거고, 뒷 면일 수도 있는거야..."
그것은 오른손이었을까, 왼손이었을까. 난 보지 못했다. 왜냐면 우리가 처음 마주한 그 시점은 동전을 나에게 내밀며, '그봐요 난 동전 뒷 면에 당신이 있을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던 바로 그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온전히 돌려 나를 마주 본 그녀는 막 시간 여행을 시작한 이상한 나라의 폴같은 눈동자로 이쁘게 나를 향해 웃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다시 기억해 내었다. 그건 두 개의 문이 있는 어느 1층이었던 것 같다. 나와 어떤 여자가 나란히 각각의 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 두 개의 문은 마치 한 번쯤 지나쳤던 장소처럼 눈에 익은 곳이였다. 나는 왼쪽에 있는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돌리려는 찰나, 턱이 이쁜 어떤 여자가 내 등을 두드렸다.
"고마워요. 나를 처음으로 다시 오게 해 줘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그녀는 싱긋 웃고, 오른쪽 문을 사뿐이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둥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온 세상의 먼지 티끌 같은 점 하나로 왼쪽 문 안 세상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