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만 남기는 어설픈 기억력
독서, 영어, 일어, 글쓰기, 여행.
내가 좋아하고 꾸준히 하고 있는 것들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꾸준히 하고 있는 취미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독서에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를 가리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철학과 인문학 책을 볼 때 가장 큰 감동을 받는다.
고개가 절로 주억거려지고, 속으로 '정말 옳은 말이야'를 수십 번 되뇐다. 그 감동 그대로 마지막 장을 덮을 땐 가슴까지 뜨거워진다.
읽기 전의 나보다 훨씬 성장한 사람이 된 듯한 뿌듯함까지 더해.
아쉽게도 감동은 거기까지다.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별 기억이 안 난다.
감동의 기억만 선명하고, 내용의 기억은 흐릿하다. 아는 척하느라 얘기하다 보면 내용이 뒤죽박죽 되어 혼자 열심히 짜깁기를 하고 있다.
창피하고 낭패스럽다.
철학이나 인문학 강의를 듣다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는 하니 그나마 그것이 독서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력이 안 좋은 건지, 감동이 기억을 덮어버리는 건지...
오랜 시간 많은 책을 읽었어도 선호하는 장르나 작가에 대해 똑 부러진 설명은 불가능하다.
참... 어설피 안다. 대화를 할 때 혹시 소재가 된다면 아는 척할 수 있는 정도. 딱! 그만큼이다.
독서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은 단연코 영어이다.
돈도 많이 썼고 시간도 많이 들였다. 지금도 영어 공부를 쉬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여행 가서 곤란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다. 혹시라도 여행지에서 분실이나 사고 등이 발생하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되는지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다.
좋아하는 다른 분야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푹 빠져서 하긴 하는데 시간과 노력에 비해 전문성은 없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새삼 내 글쓰기의 어설픔에 또 한 번 놀라고 있다. 다행인 것은 어설픈 실력에 비해 상처는 별로 안 받는다.
어설픔이 늘 기본값으로 깔려있기에 그냥 당당하다.
아직 어설프니 상위 레벨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그만 두지 못하고 계속 붙들고 가고 있다.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어서 마음은 늘 바쁘고 시간에 쫓기며 산다. 집에만 있어도 바쁘다.
그래도 이런 바쁨이 나에게 활력과 작은 성취감을 선사해 준다. 어설퍼도 달팽이 걸음만큼의 발전은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설픈 자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