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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풀 Nov 24. 2021

준비 안된 취업

인생의 로드맵

 첫 직장은 은행이다. 

 난 숫자에 취약하고 금융이나 재무는 관심 밖의 영역이다.

      - 하지만 이 때문에 사회생활 내내 마케터로 살면서 단단히 홍역을 치른다. 특히 분기별 실적을 기준으로 투자 대비 환수(ROI) 지표를 금과옥조로 하는 다국적 기업에선 재무부서는 물론 인사건 영업이건 기획이건 생산이건 모든 업무는 재무제표에서 시작해서 재무제표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여기 선 첫 직장 얘기를 마저 하자. - 


  어영부영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국방의 의무를 마치지 못하고 대학 내내 사귀던 여자 친구 하고는 헤어지기 싫다. 예비 장인어른은 군대를 마치고 와서 보든지 아님 취직을 먼저 하라 신다. 군 미필자가 응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업종 가운데 하나가 은행이다. 다행히 운 좋게 합격해서 3주간의 연수를 마치고 실전에 배치된다. 

 

  은행은 셧터를 일찍 내려서 얼핏 퇴근이 빠른 것 같지만 당일 거래된 모든 창구의 금액이 일치해야만 마감을 하고 금고문을 닫은 뒤 비로소 퇴근이다. 문제는 늘 한 곳에서 생긴다. 내가 맡고 있는 부서의 금액이 틀리는 거다. 당일 거래된 모든 전표를 되짚어보면서 금액을 확인하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곁에서 입행 동기인 상고 출신의 여직원이 주판을 흔들며 다가온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산을 하면서 잘못된 곳을 찾아낸다. 그제야 금고문 앞에서 열쇠를 돌리며 기다리던 담당 계장 얼굴에 웃음기가 스친다. 하지만 곁눈질로 흘깃 처다 본 지점장의 언짢은 표정은 어제보다 심하다. 그렇게 군대 가기 전까지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고 또,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몇 개월을 지낸다. 요즘은 많이 변했겠지만 당시는 은행마다 구내식당이 있고 그 곁에 탁구대가 놓여 있고 또 숙직실이라는 공간이 있다. 난 이 모든 게 좋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직종이지만 왠지 친근감이 들고 편안했다. 특히 퇴근 후 숙직실에서의 그 일탈이란..ㅎㅎ 입대하기 전까지 여러 부서를 전전하다가 끝내는 수표 교환이나 동전 반납을 하는 심부름 업무까지 경험한다. 그때 생각으론 대학을 졸업한 중견 사원으로서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주어진 일로 부끄럽 진 않았다. (그때는 안 그랬지만 지금은 추억으로 포장돼서 미화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이후 줄곧 직장을 옮겨 다닐 때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결혼과 군 복무라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취업은 본인이 겪는 좌절은 물론 조직에도 피해를 입힌다는 교훈이다. 요즘도 남들 들어가기 힘든 대기업에서조차 입사 1년 내 퇴사자가 30%를 웃돈다고 한다. 개중에는 나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혹은 주변의 기대와 평가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하거나 번복을 하는 시행착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겠지만 쉽지 않은 노릇이다. 당시엔 초기의 시행착오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치부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멀리 내다보지 못한 탓이다.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수시 이동이 불가피하더라도 전체를 관통하는 로드맵은 필요하다. 대략적인 스케치나마 자기 인생의 빅픽쳐를 그려볼 수 있다면 시행착오의 횟수와 간격을 현저히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 첫 직장 이후 근 10년 가까이 돼서야 은퇴까지의 그림이 그려졌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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