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독학생의 발목을 잡는 큰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새로운 곡에 대한 두려움이다. 새로운 곡을 첫 음부터 리딩해 가는 과정이란 실력도, 연습시간도 부족한 취미생에게는 너무나도 귀찮고도 어려운 일이라서, 같은 곡을 이미 익숙해질 만큼 쳐서 더 이상의 발전이 보이지 않을 때, 발전은 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제 슬슬 새로운 곡으로 넘어가야지 하고 마음을 굳게 먹어 본들, 악보를 펼쳐서 조표와 박자를 확인한 뒤 첫 음부터 더듬더듬 음악을 떠올려가는 과정이란 험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설령 그것이 귀에 익어 익숙한 곡이라고 해도 말이다). 설상가상 독학 취미러에겐 이러한 지루한 리딩 과정을 위한 기초 체력이 되는 ‘초견력’까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인지라, 리딩 과정은 더더욱 지연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피아노 취미생이 어느 정도 실력이 붙은 뒤에도(보통은 초급에서 중급으로 넘어가는 시기)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게 되면, 새로운 곡에 대한 도전 의식은 연기처럼 사그라들고 만다.
지금 내가 바로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나 싶다.
귀찮음의 시간을 수개월, 슬럼프라 치부하여 피아노를 외면한 수개월을 마침내 깨뜨리고, 스스로 나름 생각하여 내린 솔루션이 있기는 하다.
바로..
초견력을 기르는 것이다.
자, 그럼 초견력을 기른다고 치고, 과연 피아노 취미생을 위한 초견 교재는 어떤 것이 좋을까?
어려운 질문이다. 한국은 수십 년 전부터 피아노 교육 붐이 일어났을 만큼 피아노 인구가 많은 편에 속하는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시중 서점에서 ‘피아노 초견’에 특화된 교재를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듯하다. 최근 들어서는 관련 교재들이 몇몇 출판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 내용과 효율적인 면에서 결국 ‘내 수준보다 한두 단계 아래의 짤막한 곡들을 모아놓은 곡집’ 이상의 의미를 내세우는 교재는 안타깝게도 거의 없는 듯하다.
자, 그렇다면 외국 교재로 눈을 돌려야 될 텐데, 일단 직접 써 본 것 중 가장 추천하는 교재는 야마하의 ‘피아노 연주 그레이드 초견 연주 문제집’이다. 급수별로 나뉘어 있는 이 책 중 8급을 예로 살펴보면, 우선 8마디의 짧은 곡들로만 이루어져 있고, 손가락 사용법에서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번호를 적용할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을 잘 알 수 있으며, 다양한 박자, 다양한 조성, 그리고 특히 마지막 두 마디를 반드시 화음 진행으로 종지를 표현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단한 팁까지는 아닐지언정 초견에서 매우 중요한 ‘예견’에 관한 지시도 처음부터 잘 안내되어 있으며, 단순하지만 음악적으로도 완성도 있는 곡들이라 연주하는 재미가 있다는 점은 덤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견력’이 곧 ‘리딩력’은 아니라는 점이다. 두 가지는 사실 서로 독립된 다른 분야이며, 다만 초견력을 기르면 그만큼 빠른 리딩 또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리딩에 자신감이 붙으면 새로운 곡에 대한 두려움도 자연스레 줄어들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당연히 실력 향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효과를 보았느냐고?
음… 어느 정도는 확실히 보고 있다.
매우 취약했던 리딩이 ‘초견 연습’과 ‘스케일 연습’을 통해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음을 체감한다(끊임없는 스케일 연습을 통해 각 조성에 익숙해지는 것도 초견력만큼이나 리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아직도 ‘피아노 중급자’ 명패를 붙이기에는 멀었지만.
길게 보기로 했다. 평생의 취미로 삼기로 한 피아노니까, 조급해하지 않기로.
일단 올해 안에 체르니 30번과 인벤션 15곡을 마스터하는 것이 목표. (그러나 어느새 9월…)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역병 시대, 나와 같이 조용히 홀로 분투하는 대한민국의 악기 취미생들에게 응원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