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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26. 2023

나의 작은 네모 울타리

‘삽질’해서 인생 폅니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중
지쳐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네.

歸來偶過梅花下(귀래우과매화하)
春在枝頭已十分(춘재기두이십분)


 우리는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끝을 볼 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 때 그 친구를 가장 좋아했다. 하루는 친구가 그런 질문을 했다. 너는 특별히 좋아하는 이미지 같은 게 있어? 잠깐 고민하다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정말로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친구에게 되물었다. 너는? 그날 친구의 대답이 아직도 기억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절벽 끝에서도 춤을 추는 사람. 그 말을 듣는데 탄성이 나왔다. 나에게 그려지는 이미지와 내가 알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너랑 정말 잘 어울려. 정말 좋은 대답이다.


 그 후로는 나도 그런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내 것인 냥 녹아드는 이미지 혹은 글귀. 그 친구는 내가 아는 중 가장 넓은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많이 읽었고, 들었고, 그만큼 나눌 줄도 알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부했지만 때로는 질투와 열등감마저 조금 느낄 정도로 단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몇 년 동안 그 친구의 이미지를 닮기 위해 애써온 것 같다.




 스무 살 때 나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대학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른 나이에부터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많은 것을 이뤄왔던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은 너무도 작고 보잘것 없었다. 어려운 용어를 막힘없이 써가며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자기 감정을 있는대로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알지만, 그 모양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부드럽고 따듯한 사람들을 동경했다. 새로이 속한 집단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매일매일 깨닫게 되는 나의 부족함과 싸워야 했다.


 그동안 내가 속해 있었던 세계는 너무 좁은 곳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을 동시에 많이 했다. 남들이 자랑스레 말하는 과거의 시절 대부분이 나는 부끄럽고 아팠다. 나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남들은 뭔가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나에 대해서조차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중고등학생 때의 나는 그저 맹목적인 열심에 붙들려 눈을 가린 채 끊임없이 달리기만 했던 경주마였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온 이 세계에서 그런 건 별로 자랑할 거리가 못 됐다. 솔직히 그런 걸로 으스대고 싶지도 않았다.


 작은 네모 울타리.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나는 그런 것에 둘러싸여 스무 해 남짓을 살았던 것 같다.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갇혀 있는 울타리다. 나는 스무 살과 스물 한 살을 그 안을 빙글빙글 도는 데에 모조리 다 써버렸다. 울타리 안에서 까치발을 들고 남들의 세계를 기웃대며, 좋은 것은 모방하려 애썼다. 물론 그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이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내 좁은 울타리 안에는 없었다. 나는 이 울타리를 감히 벗어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이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알고 보니 태생이 그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없게 만들어진 존재였기 때문이다(ADHD에 대해 에둘러 표현한 것인데, 이에 관해서는 다른 매거진에 계속해서 글로 남기고 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넓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걸음을 내딛고 싶은데. 아무리 돌고 돌아도 결국 제자리인 이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은데. …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이제는 나도 나에 대해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갖고 싶은데.




 스물 한 살 때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참고, 숨기는 데에만 익숙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렇지 않을까 싶다.​

 우울했던 시절의 나는 못났다. 떠올리자면 부끄럽고 아픈 기억이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을 굳이 여기에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자랑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나는 아직도 종종 운다. 기억은 겨우 다 무뎌졌는데, 어떤 감정은 이만큼 시간이 흐르고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가끔은 극복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극복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짠, 다 나았어요! 같은 게 아니라고. 어느 날 갑자기 삶이 기적처럼 뒤바뀌는 일 따위가 아니라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과정이 극복이라고. 극복은 참 지겹고 지난하다. 지긋지긋하다. 끝인가? 아니다. 그럼 이번에는 정말 끝인가? 아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끝일 리가 없지. 그렇지만 믿어야 한다. 기어코 지나가고 말 것이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그렇지만 지금 이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영영 끝나지 않을 거라고.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라면, 도중에 크게 다치지나 말자고.

(21.08.04.)


 ‘모든 요일의 기록’(김민철)을 읽다 보면 나이듦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예순이 되면 인생을 좀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나이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시기는 조금 달랐지만(나는 서른을 기대했다) 전반적으로 정확히 내가 한 것과 같은 생각이었다.


 스무 살의 치기 어린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던 새벽에,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고 학교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글을 써서 올렸던 적이 있다. 이걸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뭐라도 좋으니 방법을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한 선배가 대뜸 나더러 새내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왠지 그럴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고 했다. 그러면 그런 날이 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이나 재능은 작고 하잘것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변 동기들, 선배들이 아주 훌륭하다는 최신식 포크레인에 올라타 있다면 내가 손에 쥔 것은 꽃이나 겨우 심을 작은 모종삽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이겨내려고 계속해서 땅을 팠다. 능력껏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없으니 있는대로 최선을 다해야지 싶었다.


 그러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알게 된 것들이 있었는데, 사실은 결국 전부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엇이 되고 싶을까? 아주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서 나는 왜 슬플까? 나는 왜 남들보다 생각이 많을까? 나만이 나에게 들려줄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답까지 하나하나 찾아나갔다. 그런 것이 나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누구인지 나 스스로 알게 했다.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울타리 밖의 것들에 닿지 않는 손을 뻗어가며 나를 채우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나에 대해 묻는 것. 즉 작은 삽을 가지고 발 아래를 파내려가는 것. 결과적으로 나는 여전히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었지만, 땅 아래의 세계는 여지껏 내가 밟고 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그런 것을 즐거워하며 끊임없이 땅을 파고 내려가는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 잠깐동안 함께하기도 했다. 그들의 방식은 나에게 또 새로운 것들을 알려주었고 내 세계를 넓혀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나를 쌓아나갔다. 여전히 알아나가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가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삽질‘하며 보냈던 지난 2년 여 간의 시간 덕분일 것이다.




 나의 작은 네모 울타리. 여기 갇혀 있는 것이 쓸쓸하고 외로울 때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들여다보지 않는 발밑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무수한 삽질이 지금 내 세계를 이루는 질료가 되어주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 대해 질문하고 내가 나를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 물론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앞으로도 많을 것이지만 나는 또 계속해서 삽을 들고 땅을 파고들 것이다. 더 깊은 곳, 더 넓은 곳을 향해서. 또 새롭게 알게 될 많은 것들을 위해서. 어느새 얼어있던 흙이 부드럽게 풀리고, 작은 꽃들의 뿌리가 촉촉해지면 봄이 온 줄 알 것이다. 애써 바깥에서 봄을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더는 내가 부끄럽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작은 네모 울타리가 부끄럽지 않다. 스물과 스물 하나의 삽질하는 시간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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