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 큰 어른이는 메모장에 잡아먹히지 않아요
“있잖아.”
“응.”
“나 지갑이 없는 것 같아.“
스위스의 기차역. 처음 밟아본 유럽. 기대와 설렘으로 잔뜩 부푼 마음을 안고 공항에서 숙소로 가기 위해 몸을 실었던 기차, 거기서 내리자마자 나는 이런 말을 뱉어야 했다.
“다시 한번 봐봐. 잘 찾아봤어?”
“응. 여기에도 없으면 진짜 없는 건데…“
하얗게 질려서 몸 여기저기를 훑어보지만 지갑은 여전히 나타나질 않는다. 어떡해. 어떡하지. 나는 물건을 하도 잘 잃어버려서 지갑처럼 중요한 것들은 늘 두던 곳에만 넣어둔다. 나름의 규칙 같은 것이 있다. 가방에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고, 아 혹시 그렇다면 유럽에는 그렇게 소매치기가 많대서 챙겼던 조그만 크로스백 속…에도 지갑이 없다. 이거 엄마가 선물해줘서 고등학생 때부터 계속 썼던 건데. 아끼던 건데. 십 년은 더 쓰려고 했는데. 안에 있던 돈은? 카드는? 모아놨던 사진이랑 글귀는? 경찰에 전화를 해야 할까, 아니면 공항 분실문 센터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섞여든다. 분명 정신줄을 꼭 붙들고 내내 긴장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닥치는지 본격적으로 여행 시작도 전에 기분 다 망치게 생겼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날 것 같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얼어붙어 있던 나는 급기야 이렇게 선언하고 만다. 나 다시 공항에 다녀올게. 너는 먼저 숙소로 가고 있어. 친구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본다. 야, 여기가 무슨 서울역인 줄 알아?
나보다 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은 친구가 ‘공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에만 꽂혀서 막무가내로 구는 나를 진정시킨다. OO아 여기는 스위스야. 응. 현실적으로 지금 네가 공항에 돌아가도 지갑을 찾을 확률이 거의 없어. 네가 잃어버린 건지 누가 훔쳐간 건지 아무도 몰라. 다시 왔다갔다만 해도 몇 시간은 더 걸리잖아. 따로 가다가 길이 엇갈릴 수도 있고, 지갑도 없는 채로 길 잃어버리면 그대로 국제 미아 되는 거야. 너 길치라며. 응. 나중에 경찰에 전화해보든지, 아니면 우리 돌아갈 때 취리히 경유해서 가니까 그때 공항 분실물 센터에 한번 들러보든지 하자. 지금 가서 찾을 수 있는 거면 그때 가서도 찾을 수 있겠지. 내 생각엔 그냥 잊어버리는 게 최선이야. 응…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결국 귀국하는 날까지 지갑은 다시 찾지 못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권과 휴대폰이 크로스백 안에 잘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걸 알고서 조금 뒤에 친구도 이리저리 짐을 살피더니 자기 지갑도 사라졌다며 정말로 소매치기가 우릴 털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내 생각에 나는 취리히 공항에 지갑을 두고 온 게 맞는 것 같다. 기차표 끊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잠깐 앉았던 테이블 위에 놓아뒀던 지갑이 어렴풋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다. 그렇지만 계속 아까워해봤자 마음만 상하고 말 테니 더는 생각하지 않고 도둑맞은 셈 치기로 했다. 엄마와 통화하면서도 그렇게 둘러댔다. 엄마는 나만큼이나 속상해했다. 아이구 헛똑똑이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어야지. 그러게. 왜 이럴까. 나도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하는 건데, 왜 꼭 한번씩은 이 모양일까.
유럽에서 돌아와서는 엄마를 따라 잠시 외출했다가 새로 구입한 지 세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에어팟을 잃어버렸다. 에어팟을 안 가져와서 우당탕탕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오는 나를 보며 엄마는 혀를 찼는데, 그 짧은 외출 잠깐 하고 들어오는 동안 에어팟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외출에서 내가 한 일은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있기, 내려서 다른 장소에 한 시간 정도 앉아있기, 그리고 다시 자동차로 돌아와서 귀가하기. 이게 다였다. 그러니까 그 짧은 동선 안에서 에어팟을 흘렸든 남을 줬든 아무튼간에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외출했던 장소로 전화를 걸어 물어봤지만 분실신고 접수된 건은 따로 없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지갑에 이어 에어팟까지 야무지게 해먹고야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이 멍청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두어 시간 남짓이었던 외출인데!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깜박깜박 잊고 돌아다니는 내가 해야 할 일이나 일정 같은 건 제때 알아서 잘 챙길 수 있겠는가. 반복해서 기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목요일엔 공부하고, 금요일도 공부하고, 토요일엔 병원 진료 갔다가 동기들 만나기로 했지!’를 계속해서 상기시켜본들 목요일과 금요일을 지나고 난 다음의 내가 토요일에 있을 동기들과의 약속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라는 거다. 확률에 맡겨야 하는 게임이라는 거다. 이 약속이 나에게 정말 기대되고 설레고 흥분되는 마음을 잔뜩 안겨주는 약속이었다면 기억하고 있을 확률 백 프로. 그렇지만 슬쩍 지나가는 말로 밥이나 먹자~ 해서 슬그머니 잡혀버린 약속이라면, 최악의 경우에는, 일정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잡아왔던 이중약속이 도대체 몇 개나 되며, 또 나조차도 황당스런 어이없는 상황에 미안함을 표하며 고개 숙일 일은 어찌나 많았던지…
중학생 때, 은사님께는 학급에 전달할 공지사항이나 업무, 수업 준비물 등을 손바닥에(!) 볼펜으로 써두시는 습관이 있었다. 당시 반장이었던 내가 선생님께 종례를 부탁드리러 교무실에 들를 때, 그러니까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끝내고 선생님들은 남은 업무를 마무리하는 방과 후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선생님의 손은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들로 까맣게 얼룩덜룩 번져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선생님의 카톡 프로필 상태메시지에는 늘 해치워야 할 업무 목록이 올라와 있었다. ‘추천서/상담/불량책상교체‘ 같은 식으로. 그땐 그게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지금은 너무너무 이해가 된다. “내가” 주체가 되어 해야 하는 일의 목록과 일정이 길어질수록 기억하기는 더 어렵고, 그러나 어떻게든 기억해내서 해치워야 하고 그러니까 자꾸 적게 되는 것이다. 메모를 하게 되는 것이다!
메모를 해야 한다. 메모는 살아남기 위한 습관이다. 내 물건 잃어버리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할 일을 못한다든가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난다든가 하는 일은 내 선에서 충분히 조율하고 조정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업무와 일정의 우선순위를 정할 것, 잊지 않도록 캘린더와 각종 메모장에 열심히 옮겨적을 것, 그리고 그것을 눈 닿는 데 두고 자주 읽을 것. 하기 싫은 일은 어떻게든! 끝까지 미뤄두고 잊어버려뒀다가 발등에 불 떨어져서야 해결하는(그렇게라도 해결이 되면 다행인) 나에게는 일정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여러 번 상기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덜렁이고 덤벙대지만 이런 식으로 약점을 보완해나가고 있다.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완벽하게 해치운 항목에는 내적 환호성을 지르며 체크(V) 표시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메모장을 기반으로 외출할 때 챙길 물건 루틴 만들고, 캘린더 정리하고, 계획표 짜고, 다 좋다. 다 좋은데 와중에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이고, 메모도 역시 그냥 메모일 뿐이라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어그러졌다고 해서 완전히 망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대비해도 내 예상 밖을 뛰어넘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칠 수 있다. 가령 스위스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린다든가, 잠깐 나간 외출에서 에어팟을 통째로 잃어버린다든가 하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
그럴 땐 그냥 웃자! 웃고 빠르게 털어넘기자. 내가 아무리 준비한들 완벽에는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속 편하게 인정하자. 어떤 것은 내가 저지른 실수의 결과라 하더라도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의 잘못을 너그럽게 포용하자. 실수하는 나도 여전히 나. 그리고 앞으로 좀 더 나아질 나. 사실 그만하면 이제는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