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며 산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by 이다이구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다소 충격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을 후려친 부조리 선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베르 카뮈를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로 생각한다. 하지만 카뮈는 스스로도 말했듯 그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


실존주의, 허무주의, 부조리주의 모두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그 영역이 겹치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른 철학이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 와 다른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속한 다른 철학들의 가장 큰 차이는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의 자세는 부조리한 세상에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것도 철학이라 할 수 있는가 싶은 이야기다.


부조리 철학의 첫 단계는 부조리 인지다.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 도덕, 진리, 사명도 없다. 아무리 나쁜 일을 저지른 악인이어도 마른하늘 아래를 잘 걸어 다닌다. 벼락을 맞는 등의 천벌은 없다. 아니, 벼락을 맞을 확률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악인이든 선인이든 똑같다.


우리가 절대적 윤리 / 도덕으로 믿는 가치들은 아주 오래전 인류가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강자를 견제하는 약자들이 만들어낸 법이다.


그리고 보복할 수 없는 무력함은 '선함'으로 바뀌고, 비굴한 비열함은 온순함으로, 미워하는 자들에 대한 굴복은 순종으로 바뀝니다...(중략))약자의 무해한 성격, 그가 풍부하게 지닌 바로 그 비겁함, 문 앞에 서 있는 모습, 기다려야만 하는 강요된 필요성이 여기서 멋진 이름들을 얻습니다. '인내'라고 부르며, 이는 또한 '미덕'이라고도 불리죠. 복수할 수 없음은 복수하기를 원치 않음으로, 어쩌면 용서로까지 불립니다

—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이러한 이야기를 진실로써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하게 될까? 대게 좌절일 것이다. 도덕을 지키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열등의 수치를 안게 되었으니 말이다. 신성하고 위대했던 인간의 몸이 오직 생존과 번식을 위한 기계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의미를 잃고 무감각해질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분홍가슴비둘기가 어디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지 어떤 사회 관습을 지니고 있는지 관심도 없고 나와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듯, 생명의 탄생과 죽음, 결혼, 도덕, 법 등 인간 사회의 기초가 되는 수많은 관습, 가치, 의미를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도 말 그대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이런 반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허무주의적인 세상을 억지로 무시하며 진실로부터 눈을 돌려야 할까? 카뮈는 이러한 행위를 철학적 자살로 규명하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살아야 할까? 마치 니체가 말한 초인처럼?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이 또한 반대한다.


알베르 카뮈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어제 그랬고 오늘 그러했듯, 내일도 그렇게 살아라. 시지프스의 영원한 형벌을 버텨라.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카뮈의 인생관은 마치 연극하는 배우와 같다. 자신이 맡은 배역이 거지라고 해서 배우가 실제로 가난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배역과 실제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멋진 연극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학생, 노동자, 서민, 부자, 예술가, 학자,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핑크 칼라 등 자신만의 유니크한 배역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부자 배역을 맡았다고 즐거워하거나, 노동자 배역을 맡았다고 슬퍼할 이유는 없다. 이건 그저 의미 없는 연극이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멋진 연극 (삶)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프로페셔널하게 맡겨진 배역에 충실할 뿐이다.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연극의 뒤편에서는 이 모든 것에 굳이 마음이 흔들리거나 몰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말이다.


거지 역할을 하는 나와 왕자 역할을 하는 저 사람은 본질적인 면에서 같다. 우리 모두 배우이기 때문이다. 즉, 경험의 질의 차이는 없다. 무의미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맡겨진 배역에 최선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