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공간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슬픔은 공간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The sadness is form, the happiness content
짧지만 강력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온 문장입니다.
모든 생명은 한 가지 염세주의적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언젠가 우리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새드엔딩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입니다. 일생동안 일군 성취를 무엇하나 챙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어야 합니다. 좀 괜찮은 새드엔딩이냐 혹은 완전한 새드엔딩이냐 정도의 문제입니다.
한 때 잘 나가던 바람둥이 외과의사, 강한 남자의 표본이었던 토마스가 결국엔 늙어 젊은 시절의 힘을 잃고 시골에서 트럭 운전수로 살아갑니다. 그의 아내 테레자는 자신 때문에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시골로 오게 된 토마스에게 미안함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초연합니다. 왜냐하면 슬픔은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우리는 모두 새드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 공간 안에 무엇을 채우냐가 될 겁니다. 우리의 끝은 비극이어도 그 사이사이에 아름다움이 깃들 수 있습니다. 흔히 카프카의 소설들이 위대한 이유가 절망스럽고 암담한 이야기 사이에 잠시 피어있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많은 날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합니다. 내일이 걱정되기도 하고 일 년 뒤가 걱정되기도 하고, 지금 당장 문제가 많기도 합니다. 어떤 각도에서 봐도 이 인생이 기분 좋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인생의 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모든 생물의 운명입니다.
토마스처럼 우리는 인생이 비극임을 초연하게 인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슬픔의 틀 안에 우리는 여전히 행복을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도움을 받기도, 주기도 하며, 웃음과 친절함으로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야 말로 알베르 카뮈가 그린 부조리주의의 자세가 아닐까요? 인생을 비극임을 초연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계속 행복을 채워 넣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말입니다.
슬픔은 공간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The sadness is form, the happiness content
가끔 살아오며 결정한 모든 선택이 후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제 사면초가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것만 같은 불길함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이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하고 한 때 존재했던 가능성들에 대해 망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것에 연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사라진 가능성에 매달려봐야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죠. 그럼 그냥 멀리서 봅시다. 가까이서 보는건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요? 한번쯤 그냥 멀리서 우리 인생을 즐겁게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슬픔은 공간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The sadness is form, the happiness cont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