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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Nov 17. 2019

영원히 고통받는 ‘사이’의 인간

폴 슈레이더 작가론과 <퍼스트 리폼드>(2017)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의 영화를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주인공이 세계로 나아 가려 할수록 세계는 그를 고립시킨다. 고립된 내면은 광기로 어른거리는 자의적 신념으로 폭발할 것만 같다. 세상 앞에 단독자로 홀로 선 폴 슈레이더의 남성주인공은 자신을 폭탄처럼 사용한다. 타락한 세상에 구멍을 냄으로써 그는 탈출하길 소원하며 이것이 선택의 선택권을 잃은 그에게 유일한 선택으로 남겨진다. 헐리우드의 유능한 각본가이자 평론가,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Transcendental Style in Film: Ozu, Bresson, Dreyer)의 저자이기도 했던 폴 슈레이더는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와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칼 드레이어(Carl Dreyer)의 세계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단독자’를 보았을지 모른다. 영혼의 어두운 심연에 갇힌 인물들은 늘 새로운 감옥에 놓이곤 했다.

  폴 슈레이더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물질과 육신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세속적 세계와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이 연출한 <택시 드라이버>(1976)의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기이한 광기와 분노를 연료 삼아 권태라는 관성에 맞서 자신을 불태우는, 고독과 외로움에 휩싸인 단독자였다. 그는 본질을 마주하기 위해 빛에 가려져 있던 도시의 어둠을 탐구한다. 매춘부, 깡패, 게이, 마약중독자의 ‘인간말종’으로 가득 찬 밤의 열기는 톰 스콧(Tom Scott)의 색소폰 연주가 주는 나른함으로 채워진다. <차이나타운>(1974)이나 <보디 히트>(1981)의 느와르 도시처럼 뉴욕의 밤거리는 어떤 비극이 일어나더라도 긴장하지 않는 정신적 권태가 지배한다. 축축하게 젖은 도로, 물기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불빛, 빈번히 물을 뿜어내는 소화전과 맨홀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난방용 스팀……. 택시에서 포르노 극장, 식당과 좁고 낡은 집을 오가는 트래비스에게 정신적 긴장을 놓아버린 도시의 눅눅함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화창한 대낮을 거니는 무료한 인간들의 사사로운 욕정과 권태로운 온도는 음모가 개입해서라도 깨져야만 했다(<아메리칸 지골로>(1980)). <금지구역>(1979)에서 착실한 칼빈교(Calvinisme) 신자로 살던 제이크(조지 C. 스콧)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조용하고 안락한 주택가를 벗어나 타락한 도시를 활보한다. 그는 매춘과 성인용품, 섹스 비디오로 들끓는 문화에 환멸감을 느끼지만, 딸을 찾기 위해서라면 포르노 영화 생산자를 자처하는 타락한 영웅이어야 했다.

  폴 슈레이더의 괴팍한 영웅들은 무엇과 싸우는 것일까. <어플릭션>(1997)의 웨이드(닉 놀테)는 딸을 데려간 전처와 새로운 여자친구, 음모론적 망상의 배후인 경찰조직과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버지라는 매개체로 전승되어온 눈에 보이지 않는 술기운 그리고 폭력과 싸운다. 늘 새로운 시작을 꿈꾸던 웨이드는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이 역사를 끝낸다. <택시 드라이버>의 밤거리는 30년 후가 지나도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비상 근무>(1999)의 응급구조원 프랭크(니콜라스 케이지)가 질주하는 밤거리는 정신을 잃게 하는 마약과 폭력, 부랑자와 시체의 악취로 찌들어버린 죽음의 공간이다. 프랭크는 아픈 이들을 죽음에서 구해 응급실로 옮겨두지만,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은 죽음을 향해 자꾸만 거리로 탈주한다. 이 밤거리는 프랭크 자신의 과오로 죽어버린 로즈(신시아 로먼)의 얼굴을 마주하는 죽음 자체이다. 그는 이 세계를 떠나고 싶지만 죽음과 동행하는 자신을 멈출 수가 없다. 로즈의 죽음을 기억하는 한 프랭크는 늘 누군가를 구해야 하고 또 이미 죽어버린 로즈를 구할 방도는 없는, 무한한 순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수난기가 된 프랭크의 일상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특근>(1985)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펜로즈 삼각형(Penrose triangle)의 환상에 영원히 갇힌다. <성난 황소>(1980)의 라모타(로버트 드 니로)가 자신의 환상과 싸우듯, ‘다른 세계의 사람’ 또는 ‘순례자’로 명명되던 폴 슈레이더의 인물들은 폐쇄된 작은 링 안에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인간들이었다.

  반영웅의 사투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싸움이다. 그들이 외부로 나아가는 것은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종종 요청하지도 않은 구원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에서 구원자가 되길 자처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강박관념>(1976)의 마이클, <비상근무>의 프랭크, <어플릭션>의 웨이드 등의 인물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소녀를 구제하기 위해 깊은 수렁으로 들어갔다. 멸망하는 미국을 떠나 모스키토 코스트를 유토피아로 만들고자 했던 <모스키토 코스트>(1986)의 엘리(해리슨 포드)는 가족을 야생의 삶에 가둠으로써 생존적 요구에 불과한 가족의 사랑을 자기 구원으로 삼고자 했던 파시스트적 구원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구제를 요청한 일이 없는 사람들은 냉담하거나 답이 없다. 심지어 폴 슈레이더는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고통과 고뇌, 환상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그렸다(<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 자신이 파멸될 것을 아는 영웅은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구원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는 내적 분열과 충동으로 자기 세계를 지킨다.

  파문되고 추방된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구원의 의미보다 구원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고독한 영웅이 도달한 곳은 어디일까. 1935년도 이후의 존 포드(John Ford) 작품에서의 존 웨인(John Wayne)은 분노에 미친 자의 질주와 그 목적지를 보여준다. 서부극의 황야는 방황을 위해 무한히 펼쳐진 무장소성(에드워드 랠프)의 공간이다. 이곳은 시스템의 외부이자 타자들의 공간,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 그 자체로 통제되어야 하는 땅이다. 내부의 문명 세계는 생존을 위해 고립되어야만 한다. <수색자>(1956)에서 존 웨인의 ‘수색’은 인간과 의미를 찾기 위한 수색이지만 자신의 인간성과 의미를 버려야만 가능했던,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을 향한 삐뚤어진 자의 고뇌였다. 사랑을 위해 돌아온 집은 그가 떠나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 된다. 드넓은 황무지에서 나타나 황무지로의 수난을 거친 이산(존 웨인)은 문명의 자유도, 전망도, 출구도 발견할 수 없는 땅을 거친 후 황무지로 사라져버린다. 이 폭력적인 반영웅의 방황은 무구(無垢)한 양으로 살아갈 수 없는 목자의 정신적 고뇌가 소멸로 나아감으로써 정신을 마주하는 순례자의 숭고한 이야기가 된다. 살인과 폭력으로 자신이 저주받고 파멸하게 될 것을 아는 반영웅은 다른 이들처럼 모순과 타협한 삶을 영위하거나 자살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순을 뛰어넘어 무(無)의 수평선으로 유령처럼 사라진다. 그곳은 자신의 환상이 무한히 연장되는, 그럼으로써 삐뚤어진 영웅이 운명적으로 향하는 초월적 세계이다.

  <퍼스트 리폼드>(2017)는 죄의식과 분노, 절멸의 감각으로 신음하는 한 인간을 비춘다. 반 영웅적 인물의 폭력성이 제거된 주인공 톨러 목사(에단 호크)는 침묵 속에서 질문하고 그 침묵을 성찰한다. 톨러는 폴 슈레이더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과 싸우며 혼잣말 속에서 답을 구하려 한다.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반영웅의 심리, 즉 세상과 분리된 반항자의 내적 분열, 자기신념을 실험하려는 강한 의지와 교만한 고독은 톨러 목사에게 삭제되어 있지만 한 영혼의 고뇌가 숭고한 지점에 이르는 것은 폴 슈레이더 세계의 주인공들과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기가 없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 자신을 단념한 태도로 보기에 톨러는 필요 이상의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위태롭게 기대는 것처럼 보인다. 톨러의 질문과 회의는 무엇을 채우고자 하는 것일까.

  폴 슈레이더 영화의 주인공들이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은 단순한 내면의 진술을 넘어선다. 늘 혼잣말하던 자폐적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퍼스트 리폼드>는 톨러의 1인칭 시점을 유지하며 그가 써 내려가는 일기를 통해 독백과 장면을 교환한다. 수기이자 고백록인 일기라는 형식은 철저히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길 요구한다. 무성영화의 1.33:1 비율에 가까운 1.375:1의 화면 비율은 생생한 색상과 선명한 명암대비의 디지털 이미지로 채워져 고전적 향수를 삭제한다. 인물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 감정을 머금은 눈동자, 머릿결, 메마른 근심을 드러내는 주름 등의 세부적인 표현은 시간의 현재성과 실재성을 강조한다. 4:3의 프레임은 풍경이 아니라 인물, 개방이 아닌 폐쇄와 정서적 구속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의 반영이다.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1950) 속 신부가 내적 번민의 균열과 긴장을 일기라는 형식으로 전했던 것처럼, 또 잉그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의 <겨울 빛>(1963)의 차갑고 냉엄한 세계에서 신의 침묵에 고통받으며 실의에 잠긴 신부의 모습처럼 <퍼스트 리폼드>는 우리를 믿음과 회의로 번민하는 톨러의 심리에 밀착시킨다.


  톨러는 빈 공간에 놓인다. 사물이 거의 없는 방의 텅 빈 느낌이나 공간의 추상적 성격으로 비어있다는 뜻은 아니다. 교회나 공원, 오염구역인 핸스타운 앞에 세워진 표지판이 보여주듯 톨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꽤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하지만 톨러가 머무는 공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비어있고 또 의미가 규정되지 않은 공간처럼 보인다. 맨자나 부부(마이클과 메리)의 집이 그렇다. 남편 마이클(필립 에팅거)이 죽고 난 후 톨러가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집을 찾아갔을 때 톨러는 마이클의 방에서 유서를 발견하고 메리가 있는 거실로 느리게 움직인다. 부부의 거실과 마이클의 방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마이클의 유언으로만 교환된다. 죽은 마이클의 방은 환경운동가의 신념을 전시하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외부와의 소통은 단절한 채 외부만을 들여다보던 희망을 잃은 자의 세계였다. 톨러가 마이클과 우울함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때, 마이클은 ‘이미 자연은 1/3이 파괴되었다. 아이가 33살일 2050년의 지구 온도는 3도, 해수면은 6cm 상승하며 그 결과로 방글라데시는 국토의 20%를 손실, 중앙아프리카는 가뭄으로 수확량이 50% 줄어들며 저수지는 말라붙고 난민과 전염병이 창궐’할 것이라며 과학적 수치로 예측된 암울한 미래를 전망한다. 마이클은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갈 아이의 미래에 느끼는 책임과 죄책감으로 아이를 지우려고 한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었던 톨러는 희망을 잃은 마이클의 절망이 문제이고 불확실성 속에서 용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미래 없음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 그들은 가까운 미래에 다시 만나 대화하길 약속한다. 그리고 미래의 마이클은 다른 세계로 가버렸다. 톨러와 메리는 시간을 짐작하기 힘든 빛의 무드에서 과거의 시간을 되새기며 소파에 앉아있다. 프레임 좌측 눈 형상의 독특한 램프는 이들을 낯선 그림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톨러가 술에 빵을 적혀 먹을 때나 메리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할 때 인물을 감싸는 역광의 빛은 그 순간을 위해 인물들을 평면 속에 가둔다. 이때 인물들은 세계에서 분리되며 내러티브와 거리를 둔다. 인물은 표피적이고 평면적인 공간의 한순간에 놓인 듯 비치며 관객은 의미가 규정되지 않은 단편적인 이미지로 전체를 추론하는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의미가 규정되지 않은 공간의 희박한 성격은 사물 쇼트의 공백과 빈자리로 강화된다. 톨러는 마이클의 미래였을 자살 폭탄 조끼를 본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깊은 내면의 어둠 속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나온 끔찍한 사물이다. 톨러가 처음 마주한 자살 폭탄 조끼는 클로즈업으로 등장하고 놀란 두 사람의 반응 쇼트가 사물의 대응으로 이어진다. 마이클의 장례를 치르고 교회를 후원하는 바크산업의 바크(마이클 개스톤)와 제퍼스 목사(세드릭 더엔터테이너)를 만난 후, 그리고 병원을 방문하고 자신을 맴도는 에스더(빅토리아 힐)에게 경멸을 토한 후 톨러는 방에서 자살 폭탄 조끼를 꺼내 본다. 이때 그것을 내려다보는 톨러의 쇼트, 조끼가 톨러를 올려다보는 역 쇼트로 교환되면서 자살 폭탄 조끼가 운명적 만남을 이루기라도 한 듯 연출되며 음향에 가까울 낮고 음산한 배경음이 불길한 기운을 증폭시킨다. 인간의 의미망에서 벗어나 있는 사물은 그것 스스로가 의식을 가진 듯 인간의 의식을 침범한다. 되직한 점도의 분홍색 위장약을 부은 톨러의 술잔은 술에 조금씩 흩어지는 약물의 운동을 포착하려는 듯 클로즈업으로 부각된다. 의식을 붙드는 이 분홍색의 오염물 같은 위장약은 오염된 핸스타운의 하늘 색상과 중첩된다. 무겁게 가라앉는 액체의 촉각성은 최종적 죽음을 예고하는 변기 세정제로 연장된다. 또는 병원 검진 때 비치던 피의 묽고 가벼운 성질과는 대조된다. 사물은 내러티브의 목적으로 배치될 뿐 아니라 내면에 눌어붙은 오염된 물질, 병으로 오염된 몸의 의미, 침윤하는 죽음의 이미지로 교환되면서 중층적인 심상을 쌓아간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트래비스 내면의 대응물로 보였던 알카셀처 쇼트(알카셀쳐: 발포 소화제, <택시 드라이버>)를 떠올리게 하는 이 사물(정물) 쇼트는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 없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는 점, 쇼트 간 일정한 간격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오즈 야스지로(이하 오즈)작품에서의 정물 쇼트처럼 기능한다. 오즈 작품 속 ‘사진 찍는 행위’가 늘 이별을 예고하는 의식이었던 것처럼(<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1934), <도다가의 형제자매들>(1941), <셋방살이의 기록>(1947), <초여름>(1951)) <만춘>(1949)과 <꽁치의 맛>(1962)의 거울(계단, 빈 의자, 사과 등)은 사진의 반사상이자 딸을 밀어낸 사물로 빈자리에 남겨진다. 떠나간 딸의 2층 공간에 혼례복을 갈아입던 의자와 거울만이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사물은 내러티브의 기능을 초과한 의미의 담지자가 된다. 이것은 딸과의 이별, 관계의 죽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결혼으로 딸을 밀어냈던 아버지의 항구한 슬픔에 조응하면서 부재에 대응한다. 내러티브의 보조물이 아닌 독립적으로 제시된 사물 쇼트는 내러티브의 인과에 느슨한 간격을 만듦으로써 어두운 복도란 동굴 깊은 곳에 침묵한 채 부재를 견디는 아버지의 시간 전체를 사유하도록 이끈다. 사물 쇼트는 전체를 가늠할 파편화된 단서이거나 무한한 심상을 내재한 최소단위의 원자로 기능한다.   

  마지막으로 일기로 진술되는 내면의 내레이션은 톨러의 목양실, 더 나아가 퍼스트 리폼드 교회 공간을 희박하게 만든다. 이 일기는 12개월이란 남은 시간을 채우려는 톨러의 흔적이다. 일기를 쓰는 톨러는 거울과 문틀, 벽이 만드는 프레임에 홀로 고립되어있고 프레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톨러는 늘 외화면 어딘가에서 들어오거나 프레임과 외화면의 경계에서 출입을 반복한다. 그는 프레임-인 하는 누군가를 맞이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프레임-인 하지만 좀처럼 목양실 바깥으로 프레임-아웃 하지 않는다. 톨러는 다른 방식의 기도(‘나는 다른 방식으로 기도할 것이다’)를 결심하고서야 프레임 내부의 어둠으로 사라진다. 그가 정신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내면의 지하세계인 교회가 톨러 자신의 육신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상흔과 비밀을 간직한 곳이자 ‘풍성한 삶 교회’의 ‘박물관’ 내지 ‘기념품 가게’에 불과한, 영혼의 구제보다는 권력의 종살이를 택하고 세상에 침묵하는, 그래서 돈으로 고쳐진 오르간의 건반처럼 세속적 힘의 의지를 대변하는 퍼스트 리폼드 교회는 병으로 죽어가는 톨러의 육신처럼 그를 가둔다.

  독백은 내면의 세부적인 진술이면서도 보이는 것과 진술되는 것의 분할이란 상이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메리가 톨러에게 기도요청을 했을 때 ‘네 말에 따라 무죄가 되기도 유죄가 되기도 할 것이다’란 톨러의 독백은 자신의 조언(‘불확실성 속에서 선택할 용기’)에 따른 마이클의 죽음에 대한 양심의 표현이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voice-over narration)은 상황의 부연설명과 모순되는 내용을 동시에 진술함으로써 총체적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분열을 초래한다. 톨러는 예배에서 ‘내 몸과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위로’를 설교하지만 일기에서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응답을 갈구한다. ‘주님께서 용서하실까요?’라는 설교 제목을 붙이면서 내면의 내래이션은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한다. 모순은 따로 떨어진 쇼트를 연결하게 한다. 또 다른 예배에서 톨러는 ‘삶을 염려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말씀을 나누지만, 세상을 염려하고 죽음(약을 탄 술, 자살 폭탄 조끼)으로 향하는 것은 톨러 자신이다. 톨러는 풍성한 삶 교회 청년들의 극단성에 화를 내지만 ‘희망 없이 고립되고 생각 없이 따른다’는 제퍼스 목사의 말은 극단으로 이끌리는 톨러 자신에게 적용된다. 톨러는 ‘자만이 절망이 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확신을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톨러를 크게 뒤흔든 것은 마이클의 신념과 확신이다. 메리가 재봉헌식에 참석하겠다고 말했을 때 톨러는 불참을 당부한다. 재현되지 않는 결심의 순간은 자살폭탄 조끼를 마주하고 자살 폭탄 영상을 보던 시퀀스, 무덤의 묘비를 일으켜 세우며 진술했던 ‘요한계시록 11:18(심판과 멸망)’의 독백을 기억에서 찾도록 한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독립적 의미는 직접적 상상의 개입과 총체적 의미를 유예시키며 장면을 분할하고 또 비워나간다.   

  그러나 이 비워진 자리는 잠재적 의미로 연장되고 무한으로 나아간다. 목양실은 톨러의 정신적 고립과 분열의 공간이자 총체적인 상으로의 접근을 방해하는 내면의 내레이션과 쇼트로 의미가 희박해진 공간이었다. 한편, 이 공간은 관객을 환상으로 이끄는 초월적 세계가 된다. 메리와의 ‘신비한 마법 여행’은 우주에서 지상의 자연으로, 오염된 땅 위를 비행하는 환상으로 도약한다.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감독의 서명과도 같은 미장센인 공중에 부유한 이미지나 낙하하는 운동은 영혼의 상태를 표현한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위로 부유한 두 사람은 끔찍하게 파괴된 환경을 지나며 합일의 아름다움과 충만이 아닌 불안과 두려움 속으로 사라진다. 일시적인 충만 그리고 암전. 이 파괴는 물질적 풍요, 즉 풍성한 삶의 결과다. 두 사람의 합일은 영화의 엔딩인 격렬하게 키스하는 두 사람을 360도 트래킹 쇼트(360° tracking shot)로 비추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정적이던 카메라의 급격한 움직임, 현실에서 이탈한 예외적 상황이라는 점에서 톨러의 공간은 그 자체로 환상이 된다. 톨러가 걸어 잠근 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메리에게만 개방되기 때문이다. 재퍼스 목사가 목양실로 찾아갔을 때 문은 잠겨 있었고 광기 어린 고통에 흥분한 톨러는 자살 폭탄 조끼를 벗으며 목사의 노크에 반응하지 않는다. 톨러가 자신의 맨살에 철조망을 감으면 에스더가 부르는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Leaning On The Everlasting Arms, 405(통458))’ 찬송가로 재봉헌식이 시작된다. 피가 배어 나오는 정결의 알브(흰색의 예복)를 입은 톨러가 자살을 결심한 듯 -‘주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과 ‘분별력’을 생각하는 내면의 내레이션으로 등장한- 변기 세정제를 술잔에 붓는다. 톨러는 스스로 죄의 대속물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메리의 침입에 완전히 무너진다. 두 사람은 온전한 영혼의 합일을 원하듯 서로를 안고 확인하며 갈구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암전과 바람 소리는 톨러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세계일 것이다. 회의와 번뇌로 영혼을 좀먹던, 독백의 정신을 지탱하던 병든 육신은 어떠한 강제도 없는 사랑의 자유로, 공기의 흐름만 남은 침묵의 현현으로 해방된다. 폴 슈레이더는 <퍼스트 리폼드>의 톨러를 새로운 세계로 해방함으로써 자유의 순간을 열어 보인다. 마룻바닥의 땅속과 하늘 사이에서 무궤도한 자유로 고뇌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톨러는 폴 슈레이더 전작의 인물들과 동일한 인간이었다. 톨러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시험은 조화와 풍요에 기초한 조직도, 명분에 기초한 단독자의 죽음도 아니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노스텔지어>(1983)에서 도메니꼬의 벽에 쓰인 ‘1+1=1’의 방정식이 의미하듯 희망은 합리적 계산에 의한 예측도, 공리적 원리에 오용된 믿음도 거부한 채 한발씩 내딛는 영혼의 순수성, 순수의 믿음으로 열린다. 사랑의 침입과 구원은 사랑을 믿었던 이가 도달한 자기 자신의 구원이다. 땅과 하늘 사이, 끝을 모르는 외부와 잔뜩 웅크린 내면 사이, 실재와 환상 사이에 놓인 인간은 육체와 정신 사이의 격정적 운동인 사랑으로 구해진 영혼의 심연에 도달한다. 신념을 가진 한 종교인의 실험이 인간을 신격화하려는 명분의 유혹을 넘어 사랑에 닿은 결론은 무(無)의 암전으로 표상되는 최후의 자유가 모순되고 오염된 생을 온전히 수용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폴 슈레이더는 극단의 세계 사이에 놓인 인간의 고뇌와 광기의 순례를 거쳐 최후의 자유 거하는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무신론적 광신도를 넘어 독실한 회의론자로 귀결한다. 바깥으로의 탈출이 아닌 내면의 자유를 찾는 것, 무한의 세계로의 침잠은 최초의 전환(First Reformed)이라는 점에서 사이의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큰 혁명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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