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고, 오빠 제안으로 언니랑 사찰 여행을 가게 되었다. 우이동 법화사라고 하는 절에 다니시는 보살님과 처사님 몇 분이 모여 떠나게 되었다. 백담사를 거쳐 오세암을 지나 설악산 봉정암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오세암을 지날 무렵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라는 반복되는 구간에서 지쳐가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 건네주는 오이가 ‘이렇게 상큼할 수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땀이 범벅이 되어 더는 가기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 봉정암에 도착했다. 여기를 평생 세 번 정도 오게 되면 저승사자가 가마를 태워서 데리고 간다고 할 정도로 정성과 기도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이었다.
땀으로 범벅된 몸을 차가운 물에 씻고 오면 식판에 미역국과 김치 한 조각 그리고 단무지밖에 없어도 ‘시장이 반찬’인지 더 먹고 싶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다 보니 주변 소리에 민감해졌다. 눈은 감았으나 법당에서 들리는 보살들의 동작이나 말소리에도 집중되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해달라고 108배 염주를 돌리며 3천 배를 하는 보살, 남편 사업이 힘들어 극복하게 해 달라는 보살, 대학입시에 붙게 해 달라며 100독을 하고 계시는 보살 등 저마다 기원하는 내용은 달라도 정성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때 잘 되는 집안에는 염원을 담아 정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어서구나 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나 보다.
우리는 다음날 봉정암에서 주는 주먹밥을 들고 설악산 대청봉까지 오른 후 반대편 길로 내려왔다. 내려올 때쯤 밤 10시가 넘었고 차편도 끊겨 잠을 잘 만한 곳을 찾았다. 근처 사찰이 보여서 주지 스님의 넓은 품을 생각하며 하룻밤을 간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이 절은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이름이 걸린 연등이 맨 앞에 장식할 정도로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절이었다. 방도 많아 보였다.
맞은편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에 켜진 등이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전등처럼 환했다. 순간 산타할아버지가 뜨거운 여름밤에도 나타나 하룻밤이라는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았다. 한편으론 부처를 믿고 깨달음을 찾는 신도에게 하룻밤도 허용하지 않는 사찰을 쳐다보며 웅장한 건물 모습에 씁쓸했다. 작은 암자에서 수행하는 스님의 경우 어렵게 구한 반찬도 꺼내며 먹고 가라며 격려해주시기도 해서 더 그런 감정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2시간을 걸어서 읍내 여관에 도착했다. 그날 다들 말은 하지 않았으나 하룻밤을 ’ 거절‘한 사찰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크게 지어졌는지 공감하고 있었다. 시주를 많이 하는 큰 손이 있는 사찰의 경우 오히려 더 야박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겪고 보니 실감이 났다.
사찰 여행을 다녀온 후 나도 모르게 사찰 주지 스님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주지 스님이 인색하면 그 절에 모신 부처도 인색하게 보였고, 젊은 여성과 자동차에서 내리는 스님을 보면 잿밥에 관심 있는 무늬만 스님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하면서도 품새가 넓어 보이는 스님이 주지로 계신 사찰을 다니기도 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사찰 주지 스님에게 한결같은 모습을 기대하고 접근했으나 중간에 내가 생각하는 수행승의 모습이 아닐 경우 바로 등을 돌리고 나와버렸다. 지나고 보니 난 달을 본 게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부처를 찾았던 것이다. 결국 그걸 보고 있는 내문제였지 그 사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한결같은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었다.
시간이 스승인가 보다. 이제는 어떤 환경에 놓이냐에 따라 내 마음이 바뀌는 게 아니라 그걸 바라보고 해석하는 내 마음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먼저 살피는 지혜가 생긴 것이다. 20대 초에 떠났던 사찰 여행을 다시 한다면 그때는 그곳에서도 부처를 발견하는 눈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