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과정을 마치고 5년 정도 일을 했었다.
심리학과는 관련 없는 무역 일이었다.
무역 일을 하게 된 건 석사 과정 2년 차의 여름 방학 때였다.
잠깐 한국에 와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문득 아버지께서 '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나는 고된 석사 과정에 지쳐 있어서 박사 과정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해 본 후 아버지에게 사업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곧바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사업이라는 게 그렇듯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나만의 작은 회사를 성장시켜 나간다는 재미가 있었다.
퇴근 후에는 전반적인 무역 업무에 관한 것부터 무역 업무, 회사 경영에 대한 것을 공부했다.
그렇게 2년쯤 지났을까. 회사는 조금씩 성장했지만, 심리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무엇보다 심리학에 기반을 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고 채용공고를 살펴본 후 어느 심리 검사 관련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얼마 있지 않아 면접을 보라는 연락을 받고 준비를 하여 면접을 보게 되었다.
대표와 면접을 하였는데, 첫마디는 공백기에 대한 것이었다.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이를 써먹지 않고 전혀 다른 무역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면접은 흘러갔고 나는 합격 연락을 받지 못했다.
종종 나는 면접 때의 일을 떠올린다.
공백기라는 것이 대체 뭘까.
인터넷에 공백기라고 검색해 보니 부정적인 반응밖에 없다.
공백기라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걸까.
사실, 공백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경험한 것, 여러 사람들을 만난 것, 사무부터 영업까지 다양한 업무를 해 본 것 등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과 의미를 주었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 과거의 여러 경험들은 하나의 점들이다. 지금 보면 무의미하게 보일 수 있는 점들은 어느 순간 서로 연결되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공백기 동안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쉬는 것도 당시 그 사람에게는 필요한 경험이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백기를 나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이다.
공백기를 그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시간 낭비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한숨 돌릴 수 있는 휴식기,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 기간 등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나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경험으로 생각한다면 그저 단순한 공백기가 아닌 유의미한 기간이 되지 않을까.
과거 경험에 대한 의미 부여를 통해 '나 자신'을 만든다고 주장한 정체성 학자들(예, McAdams, McLean 등)에 따르면, 똑같은 경험이라 할지라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정체성 발달과 심리적 건강이 다르다고 한다. 가령, 오랜 시간 취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경험을 그저 '실패'로서 받아들인다면 그 경험은 부정적인 의미를 주는 경험으로서 종결된다. 그러나 그 경험이 쓰라릴지라도 '수많은 도전을 했던 경험' 등 무언가 나에게 의미를 주는 경험으로 생각한다면 삶의 교훈을 주는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 실제로, McLean은 연구에서 부정적 과거 경험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그 사람은 부정적으로 해석한 사람에 비해 정체성이 더 발달되어 있으며, 심리적 건강이 높다고 하였다.
공백기는 자기소개서에 쓰이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이력서에는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삶의 흔적들인 것이다.
공백기는 사람마다 그 형태가 다르지만 저마다의 이유와 의미가 있는 기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