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의 에세이에서 쓰기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온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첫째는 온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다.
둘째는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이다.
셋째는 역사적 충동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넷째는 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다.
이중 온전한 이기심과 미학적 열정은 내가 혹은 우리가 글을 쓸 때 가지고 있는 잠재적 결핍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결핍에서 오는 쓰기의 갈망은 무언가를 적음으로써 해소가 되는 치유의 미덕이며 또한 전체적으로 삶에 대한 기억의 화질을 높이는 행위인 것 같다.
살아가면서 어떤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인지, 놓치지않아야 하는지의 연습을, 글을 쓰면서 계속해왔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글을 쓰는 날은 어쩐지 인생을 두 번 사는 느낌도 들 때가 있다. 겪으면서 한번 해석해서글을 쓰면서 한번 이러한 연습 덕분이었을까 인생이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직업 덕분에 많은 아이들의 글을 읽게 된다. 아이들의 문장을 때때로 어른의 문장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하고 놀라울 때가 있다. 나이가 조금 더 어린아이들일수록 표현은 더 다채롭다. 오감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이런 식이다. 3월 새 학기가 되어 학년이 바뀌고 반의 이동으로 낯선 친구들과의 수업에 느끼는 순간의표현들을 이렇게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첫 체육시간 함께 뒤섞여 놀다가
우리는 각자의 고유의 냄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의 머리카락에선 걸레 냄새가,
우리의 옷에선 중학교 2학년 남학생 냄새가,
뛰어다니는 곳곳에서 오래된 묵은 김치의 냄새가 피어났다.
까르륵 그렇게 우리의 첫 체육시간은 한여름 냄새다.
묘사의 힘이다. 이런 글을 읽다 보면 종이에 쓰인 것만을 맞이했을 뿐인데 어디서 구린 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된다.
좋은 글은 어떤 느낌을 겪는지 잘 기억하고 옮겨 적는 과장에서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그것을 부지런히 사랑하는 일 중 하나라 생각한다. 또한 나를 새롭게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꾸준한 글쓰기는 결코 나에 대한 사랑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에 갇힌 글쓰기는 좁은 세계에 갇힌 듯 답답하기만 하다.
꾸준한 글쓰기는 나를 관통하고 내 주위의 세상을 그리며 넓은 세계를 표현하는 과정들이다. '나'에서 '우리' '그녀' '그들'.... 이렇게 주어를 옮기고 추가하며, 1인칭 관점에서 해석했던 부족함들이 3인칭 관점으로 확장되어 나 자신에게 갇히지 않고 '엄마의 마음으로, 이웃의 마음으로, 아이들의 마음으로' '동물의 마음으로' 입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오류를 법해던 해석들이 더한 빛을 바라고 나를 더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작업이라는 걸 매번 쓰면서 알아간다.
우리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도 흘러간다. 찰나의 이 감정을 보존하기 위해 나는 지금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