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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Jul 18. 2017

#글쓰기 연습① 디테일에 집착해라

기자 초년병 시절

'그는 가난했다'는 문장을 썼다가

선배에게 혼이 났다.

'문장이 게으르다'는 이유였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지만

폐지 주워 판 돈을 한푼두푼 모아

수년째 기부해온 홀로 사는 60대 남성이었다.


직접 '가난했다'고 쓰지 말고

팩트를 촘촘하게 배열해 독자가 자연스럽게

'아 이 사람은 가난했구나'하고 느끼도록 쓰라는게 선배의 주문이었다.

그게 기자의 글쓰기라고.


그러면서

"양해를 구해 그 사람 집에 같이 가보라"고 했다.


'아니, 요즘 세상에 집을 찾아가라니...'

아직 기자 물이 덜 들었던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집에 같이 가도 좋을지 물었다. 

남자는 한번도 집에 누군가를 데려가 본 적 없는 듯 쑥스러운 표정으로 좋다고 했다.

집은 영등포 쪽방촌이었다. 밤 늦도록 그의 방에 머무르고 난 뒤 문장은 이렇게 달라졌다.


'그는 한평짜리 쪽방에 사는 5급 장애인이다'

'창문도 없고 난방도 안 되는 방에서 전기장판 온기에 의지해 겨울을 난다'

'냉장고에는 시큼한 김치 한 통과 수돗물이 든 물통이 전부였다'

'그의 한달 수입은 구청에서 주는 생계비 38만7650원과 장애수당 3만원이 전부다. 방값 25만원을 내고, 나머지 16만7650원으로 한달을 산다'

'통장 잔액은 1만원을 넘겨본 적이 거의 없다'


'가난하다'는 말은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표현은 더욱 깊어졌다.


미려한 문장을 쓴 것도 아니다.

다만 문장 하나에 팩트 하나씩을 넣었을뿐이다.


시간이 흘러

후배의 '가난했다' 류의 문장을 봤을 때

나도 똑같이 '문장이 게으르다'고 말하게 됐다.


옷차림 쓱 훑어보고,

얘기 몇 마디 나눠보고

'그는 가난했다'고 썼다는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흔히 신문사에선

'문장이 울면 독자는 울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자가 직접적으로

'그는 슬펐다'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고 써봐야

독자는 울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담담하게 팩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다.

기자가 느낀 바를 독자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그러려면 디테일에 집착해야 한다.

일상의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팩트 하나하나를 잡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내가 연습했던 방법은 '스케치 하기'였다.

카페 창가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 거리의 풍경을 글로 옮겨보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점심시간 구내 식당에서도 할 수 있다.


그저 '식당은 붐볐다'가 아니라

'낮 12시10분, 100석의 식당은 빈 자리가 없을만큼 꽉 들어찼다. 식판을 든 10여명이 자리를 찾지못해 서성이고 있었다'고 써보는 것이다.


여건이 안되면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된다.

머릿속으로 상황만 묘사해봐도 좋다. 발견한 디테일에 집중해 스마트폰으로 찰칵 찍어도 된다. 이렇게 짬날 때마다 연습해보는 것이다.


익숙하고 게으른 표현에서 벗어나

디테일을 담다보면 문장이 좋아지고,

읽는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p.s

'디테일의 교훈'을 얻게해준 그 날 기사는 결국 이렇게 나갔다.


2008년 6월 17일 오후 1시,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사회복지과 사무실에 까만 배낭을 멘 초로(初老)의 사내가 들어섰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등에 진 배낭을 풀어 플라스틱 고추장 통을 꺼내더니, 10원·50원·100원짜리 동전 20여개를 와르르 책상 위에 쏟아 부었다. 모두 1370원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 병원 황세희(여·33) 주임에게 사내는 어눌한 말씨로 말했다. "화상 입은 아이 돕는 데 써 주세요."

석달 뒤 사내는 또 나타났다. 이번엔 2850원을 놓고 갔다. 보름 뒤 다시 왔을 땐 "요즘 좀 힘들었다"며 미안한 얼굴로 310원을 내밀었다.

황 주임은 "한두번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꾸준히 찾아오는 걸 보고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황 주임은 사내가 가져온 동전을 꼬박꼬박 사내의 이름으로 한림화상재단 통장에 입금하기 시작했다. 작년 6월부터 13일까지, 8개월 동안 22차례에 걸쳐 사내가 기부한 돈은 모두 4만7940원이다.

'고추장통 기부'의 주인공인 이재환(64)씨는 한평짜리 쪽방에 사는 5급 장애인이다. 창문도 없고 난방도 안 되는 방에서 전기장판 온기에 의지해 겨울을 나고 있다.

그는 재산도, 직업도, 가족도 없이 환갑을 넘겼다. 고향은 부산. 어머니는 철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여덟살 때 쥐불놀이를 하다가 친구가 던진 불붙은 깡통에 맞았다. 오른쪽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화상을 입는 바람에 살이 오그라들어 평생 오른쪽 무릎을 제대로 못 쓰고 살았다. 노름에 빠진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새장가를 갔다.

그는 16세에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고아원에 들어갔다. 어른이 된 뒤엔 부산의 달동네를 전전하며 막일을 했다. 34살 때인 1979년, 대처에 가면 먹고 살기 쉬울 것 같아 서울에 올라왔다. 관광버스 손님 모으는 일부터 이삿짐 운반, 주차 관리, 아파트 경비 등으로 일했다.

그가 남을 돕기 시작한 것은 1998년 한 사회복지단체에서 수술비 300만원을 지원받아 한강성심병원에서 오그라든 오른쪽 무릎을 펴는 수술을 받으면서부터다. 그는 "그때까지 세상이 차가운 곳인 줄만 알았는데, 난생 처음 남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고 어떻게든 은혜를 갚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모 백화점 주차관리 요원으로 일하면서, 어린이 암 환자 박모(2007년 사망·당시 19세)양에게 매달 10만~40만원씩 모두 470만원을 부쳤다. 그의 기부는 2005년 몸이 아파서 일을 그만둘 때까지 이어졌다. 무릎을 편 것까지는 좋았지만 허리 신경에 문제가 생겼는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릎이 찌릿찌릿해 서서 일을 할 수 없었다.

이씨의 한달 수입은 구청에서 주는 생계비 38만7650원과 장애수당 3만원이 전부다. 방값 25만원을 내고, 나머지 16만7650원으로 한달을 산다. 점심은 장애인 복지단체에서 주는 무료 배식으로 해결한다. 통장 잔액이 1만원을 넘겨본 적이 거의 없다.

그는 지난해 6월부터 매일 새벽 1~4시 영등포 중앙시장 일대의 골목길을 돌며 폐지와 유리병을 줍고 있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 철제 손수레에 노란 마대자루를 싣고 다니면서 골목 곳곳에 쌓인 쓰레기 봉투를 발로 툭툭 찬다. 깡통 소리가 나면 손으로 봉투를 풀어헤쳐서 소주병, 음료수 캔, 막걸리 병 등을 찾아 마대 자루에 담는다. 매주 토요일, 고물상에 가서 1500~2000원을 받아온다. 그 돈을 고추장통에 '저금'했다가 한강성심병원에 가져다 주는 것이 그의 낙이다.

이씨는 "처음 병원에 기부한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엔 따뜻한 기억이 없어요. 혼자서 외롭게 살아왔는데 뭐. 가족도 없고…. 그냥 쓸쓸하게 방에 누워 있는 거지. 적은 돈이지만 남을 돕는 데 쓰고 나니 '내가 좋은 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했어요."

1998년 이씨가 무릎을 펴는 수술을 받은 뒤부터 줄곧 이씨를 돌봐온 한강성심병원 장기언(48) 박사는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남을 위해 새벽마다 폐지를 줍는다는 것이 놀랍다"며 "(이씨는) 우리 병원에 큰 선물을 준 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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