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결국 사람에 대한 기억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행지의 풍경도, 건물도 우리에게 많은 감흥과 추억을 안겨다 주지만, 결국 그 나라, 그 장소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은 사람에 의해 좌우될 때가 많다. 한 사람으로 인해 그곳의 기억이 아름다움으로 남을 때가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다.
파리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내가 예약한 숙소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지하철은 어떻게 타야 하는지,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그토록 그리던 파리에 도착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파리 북역 한가운데 나는 세상이 정지된 느낌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종이 지도를 보고 직접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가는 여행을 선호하기에, 나는 유심칩을 구입하지 않았다. 와이파이가 가능한지 확인하였다. 다행히 10분간 역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메일함에 가서 숙소에서 나에게 보내준 메일을 찾아서 주소를 캡처하였다. 블로그에 가서 내가 갈 숙소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확인하였다. 지하철역 이름을 캡처했다. 파리의 지하철은 어떻게 타야 하는지 초스피드로 검색하였다. 사람이 붐비는 역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처럼 긴장감과 초 집중력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캡처했다. 임무 완수! 됐다. 이것만 있으면 무사히 숙소까지 도착할 수 있다. 휴...
유럽에 오기 전에 도쿄에서 1박을 했는데 공항철도 표까지 전날 끊어놓고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서, 신주쿠에서 공항까지 아침에 24만 원을 내고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갔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린 듯하다. 런던에 새벽에 도착했는데 그때도 숙소 위치를 모르고 와서, 인적도 없는 깜깜한 거리에서 물어볼 사람을 찾아왔다 갔다 헤매다가 겨우겨우 숙소를 찾아갔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도 런던에서 머무르는 6일 동안 파리의 숙소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찾아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었다. 무계획으로 좌충우돌 여행을 선호하지만 이렇게 낭패를 본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난 그 덕분에 만나게 된 파리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숙소 근처라는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캡처한 주소를 가지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쉽게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물어보는 사람마다 모른다 였다. 당황스러웠다.
어떤 흑인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그 역시 갸우뚱 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소가 캡처된 내 폰을 보며 한참 고민을 하였다. 이리로 저리로 몇 걸음씩 왔다 갔다 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느 상점에 들어가서 물어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저리로 한참 갔다가 다시 이리로 한참 와서 둘러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히 저 사람 때문에 시간 지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러다가 이상한 데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은근히 들었다. 낯선 동양인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가며 이토록 열심히 길을 찾는 모습에 고마움 반, 의심 반의 마음이 들었다.
20분이 넘는 시간 만에 결국 숙소를 찾아내었다. 허무하게도 지하철역에서 동네 골목 쪽으로 불과 몇 분 거리에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 청년은 상점에만 몇 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으로 그 숙소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묻기도 했다. 나를 위해. 세상 처음 본 낯선 여행자를 위해.
불친절로 악명 높다던 파리에서 나의 첫 경험은 그러하였다. 그 청년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몇 번 괜찮다고 했는데도 끈질기게 끝까지 나의 숙소를 찾아주었다.
숙소 입구까지 함께 간 후 나는 너무 고마워서 계속 고맙다고 얘기를 했고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청년은 그제야 미소를 띠며 쿨하게 뒤돌아서서 엄지손가락을 한번 치켜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 청년의 뒷모습은 여전히 선명하다.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좋은 경험도 많았다. 그중에 이 청년은 내가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최고 중의 최고였다. 지금도 종종 그 청년을 생각한다. 덕분에 파리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유독 파리에서 친절하고 좋은 현지인들을 많이 만났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이 그립다.
기회가 된다면 그 청년이 나에게 베풀었던 친절을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다.
그러한 경험은 서로의 여행과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 청년은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하고,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감동과 고마움이 솟아오른다.
이 마음이 머나먼 땅에 살고 있는 그 청년에게 전달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