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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Jun 17. 2024

마지막 산에 오르다.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34

 2022년 6월 12일

 걷기 30일 차: 라스 에레리아스 -> 오 세브리오 -> 리나레스


 새벽에 천둥과 번개, 세찬 비가 쏟아졌다. 고요한 밤을 맞이할 줄 알았으나 오늘도 실패. 다행히 날씨 앱을 보니 아침에는 해가 난다고 해서 천천히 짐을 싸고 기다렸다. 7시부터 서서히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이곳 조식이 8시인 것이 천만다행이다.

 조식은 깔끔하게 한 상 차림으로 준비됐다. 맛도 퀄리티도 좋았다. 맛있게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산으로 출발. 해가 쨍하고 난다. 어제 소나기를 잠시 만난 것 빼고는 이번 여행에서 날씨운이 참 좋다. 날씨 요정인 아빠 때문인가? 네잎클로버의 여왕인 엄마 덕분인가?

 한 노부부가 수레를 한 손씩 나눠잡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등에는 각자 큰 가방을 메고 서로 힘을 모아 짐을 끌고 올락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곳에 오면 매번 느끼지만 내게도 그런 사람이 나타날까? 함께 걷고 힘든 일을 나누고,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 파트너. 우리 부모님만 봐도 노년에는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유독 이곳에서는 가끔 내 인생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울창한 숲을 만났다. 마치 강원도에 있는 설악산을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 가족과 놀러간 계곡과 산을 만나는 느낌. 물 흐르는 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가 추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오늘은 12km 정도만 걷는 가벼운 일정이지만 산을 넘어야 하기에 쉬엄쉬엄 걷는다. 마을 수돗가에 있던 귀여운 고양이도 만나고. 해가 쨍하지만 그늘은 시원하고 기분 좋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길을 걸으니 기분이 좋다.

 점점 나무 그늘도 없어지고 고도가 높아진다. 아빠의 체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다. 예전엔 얕은 오르막도 숨 차 하셨는데 이젠 엄마와 거의 비슷하게 올라오신다.

 고도가 높은 산에 많이 보이는 노란꽃이 내뿜는 향기가 진하다. 가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노란 꽃.

<갈리시아 지방 입성을 알리는 비석>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고 오르면 갈리시아 지방의 시작을 알리는 비석을 만나게 된다. 드디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가 있는 지역에 들어선 것이다.

<말을 타고 산을 오르는 프로그램도 있다.>
<오 세브리오 1330m 정상에서>

 드디어 오 세브리오에 도착했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보고싶던 마지막 멋진 경치가 있는 마을. 온타나스, 까리온, 라네로, 철의 십자가, 오 세브리오까지 모두 좋은 날씨에 예쁜 경치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진짜 이렇게 잘, 크게 아프지 않고 걷고 있음에 늘 감사한 마음이 든다. 두 번 다시는 함께 하기 힘든 경험이기에. 한 달 넘게 부모님과 외국 생활을 하며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고. 아마 다시는 하기 어려울 경험이란 걸 안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고마운 시간들.

 때마침 성당에서는 주일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저녁 미사가 아니고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아니라 화살표가 그려진 돌을 받거나 순례자 강복을 받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부모님과 성체의 기적이 있는 이곳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지난 번에 뽈보를 맛있게 먹었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뽈보는 여전히 맛있었고 스테이크도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이곳에서 장을 보고 가기로 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다음 마을에 슈퍼가 열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에서는 늘 일요일을 잘 확인해야 한다. 도시가 아닌 이상 슈퍼도 정말 잠깐 열거나 열지 않을 수도 있다.

<아주 작은 슈퍼마켓, 그래도 먹을 건 다 있다.>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라 슈퍼를 들렀다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뻥 뚫린 경치는 속이 다 후련해진다.

 내려가는 길 역시 우리나라 산과 흡사하다. 오늘 하루, 추억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내려오는 부모님을 두고 먼저 내려가 체크인을 했다. 주인 아주머니도 장을 보러 나가셨다고 해서 리셉션에서 조금 기다렸다.

 저녁 무렵이 되자 저 멀리 보이는 산에 구름이 잔뜩 모이면서 장관을 이뤘다.

 간단히 저녁을 챙겨먹고 일찍 들어가 쉬었다. 내일도 내리막을 걸어야 하니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 내일 내리막 이후엔 거의 평지라고 할만큼 고도차가 없는 길이다. 큰 고비는 내일까지다. 힘내자.



*숙소 정보: LINAR DO REI

 사진보다 실제 내부는 별로였다. 전체적으로 숙소 공간이 협소했다. 우린 4인실 도미토리를 3명이 사용했다. 하지만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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