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그 곳_까미노 데 산티아고

2018년 5월의 일상

by 에이치영

2018년 5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경험을 한 한 달이다. 30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길을 걸었다. 이 길은 프랑스 생장 피에르포트에서 시작해서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며 걷는 길인데 프랑스 영토는 하루면 지나지만, 프랑스에서 시작하는 길이라 프랑스길이라 부른다. 순례길은 프랑스길 말고 북쪽길(스페인 북부 해안가를 따라 걷는 길), 영국길(옛날 영국 사람들이 배로 도착해서 걸었던 길), 은의 길(스페인 남부에서 시작하는 길) 등 무척 다양하다. 출발지는 다양하지만, 목적지는 모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야고보 유해가 발견된 곳으로 천주교 성지 중 한 곳이다. 그래서 이 길은 주로 종교적 믿음으로 걷는 사람이 많지만, 점점 트레킹이나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들, 나에게 집중할 시간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이 걷는다.

이 길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2016년부터 이 길을 걷고 싶다는 얘기를 일기에 썼다.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해였는데 왜 일을 하는지,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공연을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등 고민을 많이 하던 해이다. 이런 마음이 쌓이고 쌓여 2018년 봄, 한밤중에 충동적으로 비행기표를 구매하고 딱 한 달 준비 후 순례길로 떠났다.

준비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카페와 블로그의 도움을 많이 받아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예산을 짰다. 배낭여행은 분명 배낭 하나에 단출하게 짐을 꾸려 가볍게 다니는 여행인 줄 알았는데 배낭, 침낭, 등산복, 등산화, 우비 등 필요한 물건이 많았고 모두 기능성 물건이라 꽤 비쌌다. 프리랜서로 일하는지라 일을 안 하면 수입이 없다. 그러니 여행하는 동안 수입은 없는데 월세며 각종 공과금 등 고정 지출이 있고 여행을 하며 쓰는 비용까지 계산하니 예산이 꽤 필요했다. 출발 전부터 준비 물품을 사느라 지출이 생각보다 컸지만, 다행히 출발 전 형부 찬스로 예산에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행 준비보다 오히려 부모님께 여행 계획을 말씀드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 혼자, 해외로, 그것도 30일 동안 걷는 여행을 한다니. 부모님께서 반대하실까 걱정됐다. 그래서 여행 준비를 다 마치고 통보했는데 부모님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괜히 나만 긴장했다. 가장 큰 관문을 통과하자 마무리는 일사천리로 됐다. 친구에게 한 달간 비울 집 관리를 부탁하고 일정을 정리했다. 한창 바쁠 5월에 여행을 간다니 부럽다는 시선과 동시에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모든 걸 뒤로하고 여행을 떠나자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난 친구들과 여행을 하면 수동적이다. 뭘 해도 좋은, 별 의견이 없는 사람. 그런데 여행을 혼자 하니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그러니 결정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내 몫.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오늘은 얼마나 걸을지, 어느 마을에서 쉴지, 알베르게에서 잘지, 호텔에서 잘지, 식사를 만들어 먹을지, 사서 먹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내 선택이었다. 대신 혼자 있으니 다른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거나 배려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됐다. 생각보다 어렵지만 익숙해지자 자유롭고 편안해졌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라 스페인도 날씨가 무척 좋았다. 걷기 시작한 첫날, 가장 힘들다는 피레네산맥을 비바람과 함께 넘었더니 그 이후엔 날씨 운이 꽤 좋았다. 아니, 좋았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비가 내리면 이 나이에 언제 비를 맞으며 걸어보겠냐는 생각을 하며 걸었고, 해가 쨍하면 너무 덥지만, 원색에 가까운 하늘과 밀밭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구름이 많으면 무덥지 않으니 걷기에 좋은 날이라 좋았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길을 걷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두 좋았다.


30일 동안 매일 평균 25km를 걸었다. 한 달이면 꽤 긴 시간인 줄 알았는데 걷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느끼게 하니까. 지루하면 천천히 흐르고 재미있으면 빠르게 흐르는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모래시계처럼. 한국에 도착하니 2018년 5월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을 꾼 듯 느껴졌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친구들도 모르는, 내 인생에서 오직 나만 기억할 수 있는 시간.

순례길을 떠날 때는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10년간 일을 했지만 늘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고 그래서 늘 겉도는 기분이었다. 갈팡질팡하며 세월을 흐지부지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길을 걷기 시작하자 이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아픈 내 몸을 돌보고 먹고 자고 쉬는 아주 단순한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하나씩 내 안이 차분해지고 비워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구하던 답이 스쳐오기도 했다. 아니 사실 내 안에 있는 답을 나는 알고 있었다. 모른 척했을 뿐.

한 달 동안 까미노를 걸으며 항상 행복하고 감사함을 느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에. 온 우주가 내가 지금 이 길 위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분이랄까. 길을 걷다 만난 외국인 친구가 말했다. 네 인생의 까미노는 이제 시작이라고. 네가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더라도 너만의 까미노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그 변화를 알아챌 거라고.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질 거라고. 실제로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만난 친구가 나를 보자마자 내게서 풍기는 에너지가 많이 바뀌었다고 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마법 같은 에너지는 100일이 한도였나보다. 그해 10월부터 미친 일정으로 일기장엔 매일 후회와 짜증과 한탄이 가득한 걸 보니.

사실 2020년 부모님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려고 준비했었다. 모든 교통편 예약과 환전까지 마쳤으나 코로나로 결국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부모님과 여행을, 멋진 추억을 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아쉬웠다. 물론 여전히 희망을 품고 코로나 상황을 지켜보고 2-3년 뒤에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늘 그 길을 그리워하고 힘들 때마다 생각한다. 그때 그 길을 걷던 느낌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내겐 까미노가 마법의 정원 같은 존재다. 나만 알고 들어갈 수 있는, 그 안에서 고요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내 안에만 존재하는 마법의 정원. 늘 그립다. 다시 갈 수 있는 그 날이 빨리 오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