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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04. 2024

하루의 여유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18

 2022년 5월 27일

 걷기 14일 차: 부르고스

 느지막이 일어났음에도 6시 40분이었다. 침대에서 더 꾸물대다가 조식을 먹으러 갔다. 뷔페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깔끔했다. 이후 가볍게 도시 산책을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유럽풍 건물이 예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산 레스메스 성당>

 부르고스는 큰 도시라 그런지 곳곳에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교구가 다른 느낌이랄까. 이른 아침 성당에 들어가니 성당을 청소하시는 분들과 조용히 자리에 앉아 기도하시는 분도 계셨다. 성당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하고 밖으로 나왔다.

<도시 곳곳에 조형물이 많이 있다.>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곳에 가기 못했는데 어제 먹은 피자 가게 옆쪽에 로스 아르코스에서 만난 한국인 아주머니가 계셔서 일본식 우동을 먹었다. 맛은 그럭저럭. 그래도 부모님은 국물이 있는 요리여서 좋아하셨다.

 점심을 먹고 부르고스 성당을 보러 갔다. 입장권을 사려고 줄을 섰는데 또 독일 부부를 만났다. 역시 순례자들이 오는 곳은 다 똑같구나. 어제 그렇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어도 다시 만나니 또 반갑다.  

<부르고스 산타 마리아 대성당>

 부르고스 성당을 보면서 다시 한번 종교가 가진 힘을 느꼈다.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길래 사람들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인가.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의미를 알기는 어려울 것 같다. 종교를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학문 또는 연구의 대상으로 바라봐서 그런 거 같다. 믿어야 알 수 있을 텐데...

 부르고스 성곽에 올랐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시와 대성당이 장관을 이뤘다. 잠시 전망대 같은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쉬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성모의 밤 행사였다. 수많은 사람이 성당 앞 광장에 모였는데 알고 보니 주교님이 오셨다고 했다. 무척 큰 행사라고. 부모님이 이런 큰 행사를 직접 볼 수 있다며 좋아하셔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 행사는 대성당에서 시작해 부르고스를 크게 한 바퀴 돌며 끝나는 듯했다. 8시 20분쯤 시작했는데 10시 3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런 큰 행사를 볼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

 부모님은 초반 행렬을 따라가시다 지쳤는지 숙소로 들어오셨다. 늦은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에 갔으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결국 초밥을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으며 창문 너머로 긴 퍼레이드의 끝을 구경했다.

 드디어 조용해진 광장을 바라본다. 이곳은 내가 4년 전에 왔던 길이다. 이번 길은 내 지난 추억을 돌이켜보는 여행이자 나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부모님과 공유하는 여행이다. 그 속에서 내가 익숙했던 곳을 보여드릴 수 있고 또 셋이 함께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그래서인지 내가 다녔던 마을을 위주로 걷고 있다. 내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을 중 하나인 온타나스로 가는 날이다. 꽤 긴 코스라 어디에서 택시를 타고 갈지 고민 중이다. 기적의 성모 메달을 주는 마을까지 갔다가 택시를 타고 내려서 걸어서 온타나스에 도착할지. 온타나스 전 마을까지 가서 택시를 탈지. 온타나스에 들어가는 길 풍경도 멋져서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서 고민도 깊어진다.

 6주 정도의 시간을 갖고 온 것이라 꽤 여유 있는 일정이 될 줄 알았는데 비행기와 떼제베로 이동하고 루르드에도 들르고 보르다 예약으로 앞 며칠을 보냈더니 순례길 위에서 걷는 일정이 빠듯하다. 아마 내가 걸었던 일정과 비슷하게 걸어야 오늘처럼 대도시에서 이틀 정도 쉬는 일정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부모님 체력을 위해서라도 가끔 대도시에서는 온전히 하루는 쉬어야 할 것이기에.

 오늘이 순례길에서 1/3을 지난 시점이고 집을 나온 지는 벌써 19일 째다. 부모님 기준으로는 꽤 긴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시는 중이다. 그것도 매일 이동하며 걷고 짐을 풀었다가 싸고. 쉽지 않은 것을 알기에 늘 긴장하는 마음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무사히 잘 걸어왔으니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같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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