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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Apr 05. 2024

아름다운 추억 공유하기

70대 부모님과 산티아고 걷기 19

 2022년 5월 28일

 걷기 15일 차: 부르고스 -> 요르닐로스 델 까미노 -> 온타나스

 하루를 쉬고 걷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그래도 순례자니까 오늘도 걸어야지.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평소보다 늦게 출발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대성당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뒤돌아 부르고스를 빠져나갔다. 공원 잔디밭에는 보더콜리와 공놀이를 하는 주민이 보였다. 한가로운 주말 아침 반려견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녀가 부러웠다.

 도시를 빠져나오다 긴 화물기차를 만났다. 한국에선 기차를 별로 보지 못해 신기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와 잠시 벤치에 앉아 쉬었다. 하루를 쉬고 걸어서 그런지 몸이 꽤 무거운 것 같았다.

 다음 마을, 화장실이 급해 찾아간 바 벽면엔 전 세계의 지폐가 붙어있었다. 꽤 화려한 볼거리였는데 주인장이 지폐를 모으는 것 같았다.

 기적의 성모 메달을 주는 작은 경당에 들어갔다. 예전에 봤던 할머니는 안 계셨지만 다른 분께서 역시나 메달을 건네주시곤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다. 기도와 헌금을 한 뒤 조용히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메세타가 시작되는 분위기였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세차게 부는 바람, 내리쬐는 햇빛.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 계속된다. 걷다 보니 내가 좋아했던 사진 포인트에 도착했다. 밀밭 위 나무 한 그루와 풍력발전기가 보이는 풍경.

 오늘도 바람이 많이 분다.

크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진 않았지만 지대 자체가 좀 높고 바람이 많이 불어 걷는 건 힘겨웠다. 그리고 주말이라 호텔 조식이 늦게 시작해 9시가 다 되어 걷기 시작했기에 햇볕이 뜨거웠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안다. 눈으로 보여도 1시간은 족히 내려가야 할 길이란 걸. 구불구불 멋진 길과 아담하게 자리 잡은 마을 모습에 아빠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내리막길에서 영국인 데비를 만났다. 며칠 만나지 못했는데 정말 반가웠다. 데비는 오늘 요르닐로스 델 까미노까지만 걷고 차를 타고 다시 부르고스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차를 타고 돌아와 이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고. 이 마을에는 혼자 머물만한 괜찮은 방이 없다며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고 했다. 잠자리에 예민한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순례길은 다들 각자만의 방법으로 즐기는 것이기에 누가 더 옳거나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고 택시를 불러 온타나스로 가기로 했다. 부르고스에서 요르닐로스까지 20km를 6시간 만에 걸었다. 부모님께서도 점점 다리 근력이 붙은 거 같다. 하긴 매일 20km 내외를 걷고 계시니 근육이 붙을 수밖에.

 택시를 타고 오니 걷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들어왔다. 내가 순례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을 중 하나인 온타나스에 도착했다. 메세타가 시작되는 첫날, 끝없이 펼쳐진 고원 속 분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다시 돌아와서 정말 기뻤다. 걸어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해 짐을 풀고 잠시 마을이 보이는 언덕까지 올라갔다 왔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마을 모습이 참 좋다.

 잠시 쉬다가 마을의 작은 성당으로 향했다. 내가 이 마을에서 좋아하는 또 하나의 공간인 성당을 부모님께도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온타나스의 성모 성당>

 이곳은 들어오면 평화롭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각 나라에서 가져온 성경이 모여있어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니 작은 마을 곳곳에 예쁜 꽃들이 피어있었다.

 알베르게에서 식당도 같이 하고 있기에 저녁 식사를 신청했다. 예전엔 12명만 신청을 받았는데 이제는 누구나 신청을 해서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숙소 자체도 도미토리보다 1인실과 2인실 등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코로나 이후 순례길도 이곳도 변화했다. 변하지 않는다면 쇠퇴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잠자기 전 부모님과 빨래터 위로 올랐다. 이 마을에서 꼭 노을을 함께 보고 싶었기에 쉬고 있던 부모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귀여운 부모님 그림자 사진>

 그리고 내 기대를 만족시키는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었다. 마을을 넘어가는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노을이 왜 이리 빨리 지는지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마을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스페인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이라니. 외국의 어느 마을에 이렇게도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런 마을에 부모님과 함께 하루 머물 수 있다니 작은 축복이나 다름없다.

 물론 혼자 왔을 때의 강렬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마 그 당시엔 힘들게 걷고 있을 때 마을의 만난 기쁨과 빨래를 가지러 나왔을 때 예상치 못하게 본 노을이 선물과 같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주친 강렬한 경험. 이번에는 그런 강렬함은 없지만 더욱 따스하고 아늑함을 느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혼자보다는 함께 해야 좋은 것이니까. 내 아름다운 추억을 부모님과 나눌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 숙소 정보: SANTA BRIGIDA-REAL 1

 흔히 옙스로 알려진 알베르게이다. 위치와 시설, 석식 다 좋다. 내가 애정하는 알베르게 중 하나.

 오늘 묵은 방도 꽤 좋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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