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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ealist Apr 04. 2021

<아무튼, 하루키>
"그만큼 네가 좋아"

이지수, 제철소, 2020



윤정     난 옛날 생각이 막 나더라. 하루키는 장점이 특히 그런데, 주인공 본인이 겪는 일인데도 스스로 주체적으로 시작한다기보다는 제3자가 "이런 모험이 있어" 하며 판을 깔아주고 끌어당기는 느낌이잖아. 거기서 오는 재미를 새삼 알겠더라고. 제목에 '모험'이 들어 있듯 실제로 모험담인 거지. 근데 모험담으로만 포장을 했으면 안 읽었을 것 같아. 하지만 주인공이 그 모습을 통해서 뭔가 발견하는 과정을 그러 나간다는 식의 원시적인 구조, 신화나 <오디세이아> 같은 구조를 현대적으로 풀어나갔다는 게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하루키가 인기 있는 것 같아. 모험담이나 여행담은 우리에게 익숙한 형식이고 읽기 쉬우니까. '추구의 플롯'이 가장 오래된 플롯이라고 하잖아. 내용은 낯설지만 말이야. 성애에 대한 묘사나 양사나이 같은 존재가 굉장히 현실적인 흐름 속에서 갑자기 막 나오니깐. 생각해보면 하루키 장편은 늘 그랬던 것 같아.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고, 그 어떤 여정 중에 각성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식이지. <1Q84>도 그렇고.


- 133쪽



하루키가 좋아서 일문과에 진학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저자는 문체 자체가 하루키였다. 나 또한 한창 하루키만 읽었을 당시에는 하루키 식으로 생각하고 글을 썼다. 그 글에는 여지없이 어설프게나마 하루키가 묻어났다. 사실 나는 일본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첫 책이 대학교 1학년 때 읽은 <상실의 시대>였고, 우리 문단의 글과는 전혀 다른 플롯에 놀라서 그 뒤로 읽지 않다가 <1Q84>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읽고 반했다. 좋은 기회에 일본에서 공부하신 교수님을 모시고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하루키 전작 읽기를 통해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모두 읽었다. 나는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그의 글이 좋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세상 아쉬울 게 없다. 지금 죽어도,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울러 길지 않은 문장과 그 길지 않은 문장에 여러 가지를 담아내는 기술을 사랑한다.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로는 더 이상 하루키를 읽지 않는다. 예전의 하루키가 아니라고 느꼈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반복되는 세계관과 플롯에 실망한 나머지 그를 향한 나의 사랑에 기름을 끼얹어 불을 질러 버리고 싶었다. 노벨 문학상 얘기는 꺼내지도 말자. 하루키는 그냥 하루키다. 아무튼, 하루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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