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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성장 Oct 01. 2024

엄마가 사라지다 / 06 버릴 수 없어

엄마의 옷장에는 버리지 못한 옷들이 가득합니다. 처녀 적부터 입었던 원피스와 한복. 그리고 외투까지 모두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원피스는 나와 엄마가 함께한 시간보다 훨씬 더 깁니다. 입지도 않을 옷을 왜 버리지 않냐고 물으니 다시 입게 될지 몰라서 못 버리겠다고 합니다. 너무 아깝다고 합니다.

엄마는 헌 옷을 좋아합니다. 내가 버리려고 모아둔 옷이나 손녀딸에게 작아진 러닝셔츠도 모두 엄마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러닝을 즐겨 입고 빨래하면서 물들어버린 옷들을 내복으로 입었습니다. 엄마의 오래된 분홍 겨울 내복은 보풀이 일어나고 늘어졌고 헤졌습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내복과 속옷 세트를 새로 여러 벌 장만해 드렸습니다. 

“아이고! 새것도 많은데 뭐 하러 또 사와?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고 죽겠다! 가서 돈으로 바꿔 와!”

엄마는 장롱 한편에서 새 내복과 러닝셔츠 상자를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새것이 있음에도 아까워 꺼내 입지 못하는 엄마가 답답하기만 합니다.

“엄마가 안 입으면 그거 다 새것인 채로 버려야 하는 거 알지?”

입맛이 없어 식사를 잘하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간식을 준비해 놓습니다. 주로 쌀과자류와 곡물 과자, 그리고 홍삼 사탕과 식사 대용 음료입니다. 부쩍 식사를 못 해 주전부리라도 먹으면 힘이 날까 생각해 열심히 사다 날랐지요. 엄마의 서랍 안 작은 창고에는 사탕과 과자 그리고 음료가 가득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느낌입니다. 챙겨주기는 하나 먹는 모습은 몇 번 본 것이 다입니다. 입 짧은 엄마를 위해 일부러 서랍에서 간식을 꺼내 같이 먹자고 합니다. 그나마도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맛만 보자며 나누어 먹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삼촌이 집에 왔습니다, 엄마는 쌀이며, 반찬이며, 엄마의 창고까지 모두 내주었습니다.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먹지 않고 삼촌에게 양보하는 엄마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엄마를 생각하는 딸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야속하기만 합니다. 

“엄마 자꾸 이러면 아무것도 사지 않을 거야!”

엄마는 힘이 없어 그런지,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손에서 물건을 잘 떨어트립니다. 내가 새로 장만한 아끼는 그릇을 엄마는 두 개나 깨뜨렸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별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 또한 설거지하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식기를 여러 번 깨 먹었기 때문입니다. 세트인 그릇이 짝이 맞지 않아 보기 싫어서 짝에 맞는 새 그릇 두 개를 샀습니다. 그리고는 식사 때 엄마에게 짝맞추어 산 그릇에 대해 색이 이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릇이 얼마나 많은데 또 사? 지 정신이 아닌가. 돈 벌어서 엉뚱한데 다 쓰고 왜 그려?”

그릇 때문에 시작된 잔소리는 돈을 왜 아끼지 않는지, 언제까지 돈을 벌 상황이 될 것인지, 맞벌이하는데 왜 돈이 모이지 않는지에 한참이나 계속됐습니다. 듣다못해 성질이 난 내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서야 끝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나도 잘 압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풍족하게 먹지 못했고,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잡혀갈까 무서움에 떨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그마저도 6.25 전쟁이 나는 바람에 남편을 잃고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고 살았습니다. 엄마는 평생 풍요롭게 지낸 적이 없습니다. 식탁에 앉아 쌀밥을 보며 배고팠던 보릿고개 시절을 떠올립니다. 쌀이 없어 보리밥을 먹었는데 그마저도 배부르게 먹지 못해 매일 속이 쓰리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귀신보다 가난이 더 무섭다고 말하는 엄마가 가엽습니다.

엄마의 배고픈 시절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건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 딸은 그것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더 과하게 말하는 거겠지요. 물론 가끔은 너무 심할 정도로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만큼 가난이 공포나 트라우마로 남아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엄마에게 밥은 그냥 밥이 아닌 ‘죽고 사는 일’에 가까울 거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유튜브에서 ‘가난을 이겨내려면 몇 세대는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 세대가 죽을 만큼 고생해야 자식들이 그나마 평범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다고요. 자식에게는 내가 겪은 가난한 서러움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심입니다. 무엇이든 열심히만 하면 벗어날 수 있는 가난이 아니지요. 그야말로 배고프고 돈 없어 서러운 삶. 나는 배를 곯아도 내 아이까지 굶게 할 수 없다는 잔인한 소망입니다. 어쩌면 엄마와 내가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면 참 춥고 배고프고 서러웠습니다. 

한 평 남짓한 옥탑방에 살았습니다. 겨울에 숨을 쉬면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지요. 분명 방안인데 바깥처럼 바람이 불고 손이 시렸습니다.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연탄은 두 장. 그나마 아껴 쓰려고 불구멍을 작게 열어두고 이불을 돌돌 말아 꽁꽁 싸매도 춥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도꼭지는 꽝꽝 얼어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2층 친한 아주머니네 집에서 물을 얻어다 사용했습니다. 여름엔 한낮 방안이 너무 뜨거워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방문을 활짝 열어두면 바퀴벌레가 날아 들어와 소스라치게 놀라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요. 썩은 음식쓰레기 냄새가 바람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와 창문마저 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데도 도무지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가난은 고통이라는 말이 체감으로 느끼고 살았습니다.

세상에 가난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금수저니, 흙수저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현실을 비관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게 어쩌면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엄마는 내가 가난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부유한 건 아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꽤 성장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가난한 시간. 엄마가 안 먹고, 안 입고, 아껴서 나를 가르치고 키웠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지요. 엄마 덕분입니다. 엄마의 희생으로 살아오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뒤돌아봅니다. 어쩌면 엄마의 잔소리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방식이 엄마에게는 나로 인해 증명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엄마의 잔소리에 짜증은 나겠지만 그래도 엄마의 마음을 더 헤아려보리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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