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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

by 아이디어셀러

“김 대리! 이번 분기 결산보고서는 어떻게 됐어?”

“김 대리! 오늘 오후 회의 자료 준비는 끝냈겠지?”

“김 대리님! 고객님 전화입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요.”

“김 대리! 김 대리! 김 대리 이 친구 어디 갔어?”


김 대리는 바빠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보고해야 할 서류는 산더미 같은데 클립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사다 놔도 막상 필요할 때면 보이지 않았다. 김 대리는 자재창고로 내려가서 캐비닛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클립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김 대리의 눈에 캐비닛 제일 아래쪽에 뚫려 있는 구멍이 들어왔다.


‘이게 무슨 구멍이지? 캐비닛이 벌써 망가졌나?’

김 대리가 손을 쑤욱 넣어 봤지만 만져지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어깨까지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어느새 김 대리의 상체까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뒤에서 김 대리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구멍을 향한 김 대리의 호기심을 막을 순 없었다.


‘이 구멍의 정체는 뭘까? 혹시 회사의 비밀 금고 같은 건 아니겠지?’

김 대리는 아예 랜턴을 켜고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몸통이 들어가기에도 빠듯했던 입구가 점점 넓어지더니 큰 방으로 통했다. 랜턴을 비추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이 보였다. 방의 넓이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우와 이건 정말 엄청나군.’

방의 한 쪽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클립이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었다. 또 다른 한 쪽에는 가위들이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막상 찾으면 없는 물건들이었다. 두리번거리며 걷던 김 대리의 발부리에 뭔가가 채였다. 다 망가진 로봇 장난감이었다. 문득 김 대리의 머릿속에 잊고 있었던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이건 내가 초등학교 때 잃어버렸던 장난감인데. 첫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 애지중지했었는데 어느 날 사라져버렸지. 이게 여기 있었군.’

그뿐이 아니었다. 중학교 운동회 날 잃어버렸던 신발 한 짝, 지하철에서 소매치기 당한 줄 알았던 가죽지갑, 어딘가에 꽂아 둔 usb메모리 등 그동안 잃어버렸던 물건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그렇군. 이곳은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물건들의 집합소 같은 거야. 4차원 공간일까?’


어느새 김 대리는 사무실 일을 까맣게 잊었다. 잡동사니들을 뒤지며 잃어버렸던 물건들을 발견할 때마다 옛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건 내가 아끼던 만화책이야. 중학교 때 친구가 빌려간 줄 알았는데 내가 잃어버렸었군.’

‘이건 얼마 전에 헬스장에서 잃어버렸던 운동화잖아?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새로 샀지 뭐야.’

‘이건…….’


김 대리는 작고 은은하게 빛나는 덩어리를 들고 잠시 생각했다. 이건 뭐지? 이런 걸 잃어버렸던가? 그러나 곧 김 대리는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빛 덩어리를 가만히 들고 있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졌다.

‘아하! 이건 내가 그동안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던 마음의 여유였어. 이렇게나 좋은 걸 왜 지금껏 잊고 있었을까?’


김 대리는 그것을 한참동안 손에 들고 밀려오는 여유로움을 음미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휴양지에 누워 낮잠을 자는 듯한 나른함이 몰려왔다. 그러다가 문득 사무실 일이 떠올랐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산산조각 났다.


‘아차, 지금쯤 내가 사라졌다고 사무실이 난리가 났겠지? 어서 여기서 나가야겠어.’

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온 탓인지 김 대리는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잃어버린 잡동사니들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문득, 김 대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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