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되지 않은 이야기
10. 오기.
그냥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막상 현실로 나가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가 갈 곳은 있을지 막막했다. 이 부끄러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몸을 숨길 곳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낙오될 것 같다는 절망감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소예, 진짜 이것밖에 안되는거야? 라는 질문이 솟아났다. 이 초라한 모습이 나의 전부일 리 없다는 강한 부정이었다. 이 자존심과 오기는 점차 커져,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겠다는 강한 의지가 되었다.
11. 작아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그때부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찾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이 상태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시도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12. 멘토링
제일 먼저, 나보다 2년 늦게 조인했지만 2년만에 승진했던 G에게 일대일을 요청했다. 그리고 나보다 여섯 살 어린 그 친구 앞에서, ‘경력만큼 많이 알고 있는 척’, ‘모든 일이 문제없이 잘 되어가는 척’ 등의 모든 가면을 내려놓고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 정말 커리어에 집중해 승진을 하고 싶은데, 나는 주어지는 일만 겨우 했을 뿐 똑똑하게 일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 너는 사람과 일의 매니징을 정말 잘하는데, 혹시 몇 달만 나를 멘토링 해줄 수 있을까?”
G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멘토링 세션을 스케줄했다. 주어진 프로젝트의 UI를 바탕으로 태스크를 잘게 쪼개 개별 티켓을 만들었다. 승진을 위해서는 나의 일과 성과를 증명할 수 있는 ‘아티팩트(artifact)’를 차곡차곡 쌓아야 했기에, 다음 레벨에 준하는 스킬을 보여주는 결과물에 포커스를 두었다. 또한, 리더십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팀원들과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프로젝트 미팅을 셋업한 후 매주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기록할 문서를 만들었다.
13. 미라클 모닝.
그 무렵, 나는 로빈 샤르마(Robin Sharma)의 <5am club>이라는 책을 읽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20분 단위로 운동, 회고, 성장을 하는 루틴을 알려준 책이었다. 변화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던 터라, 이 책을 접하자마자 ‘이거다’ 싶어 바로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는 작심삼일을 넘기기 어려웠다. 첫날은 긴장하며 눈을 번쩍 떴지만, 날이 갈수록 잠과 타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내가 미라클모닝에 관심 있다는 걸 알아챈 인스타 피드에서 온라인 미라클모닝 모임인 ‘모닝파이브’가 새로운 멤버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지원서를 접수해야 했기에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작성했고, 곧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때가 2019년 9월 즈음이었다.
14. 온전히 나와 마주하는 시간
명상, 운동, 쓰기, 읽기, 플래너 등의 순서로 루틴을 했다. 회사에서는 직장인으로, 집에선 엄마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역할을 해내느라 내 삶이 나의 것이 아닌 듯 느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깨지 않은 고요한 새벽,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마치 식물이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식물에 비유하자면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하루 종일 내 중심이 지켜지는 듯했다. 내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15. 질문 두 개 & 이미지 트레이닝.
플래너 루틴 중에는 특별히 ‘오늘의 질문 두 개’를 적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질문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고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변화하고 성장하려면 결국 극복해야 하는 문제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질문을 계속 시도해봐야 극복될 것이라 생각해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꼭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질문을 미리 써보았다. PM 앞에서 질문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왔던 순간을 떠올리며, 질문을 적을 때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까지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이렇게 질문을 한 번 적어 객관화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치면, 실제 상황에서 조금 더 수월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종이에 적힌 질문은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바보 같을 것 같은 질문’이 아니라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되어 있었다.
16. 기록 & 회고
글쓰기를 할 때는 주로 회사에서 겪었던 일이나 내면에서 갈등했던 상황, 혹은 스스로 나름 잘 해냈다고 생각하는 성취에 대한 글을 썼다. 이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막연히 ‘내가 바보같다’고 느꼈던 상황들도, 기록을 통해 돌아보면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괜찮았던 순간을 적었을 때에는 ‘나 생각보다 잘했네’ 라고 스스로를 칭찬할 기회가 생겼다.
17. 매일 찍은 점들이 모여..
그렇게 작은 시도들을 꾸준히 이어가고 용기를 낸 덕분에 적절한 도움을 받으며 작은 성취의 순간들을 기록해 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매번 아침에 질문을 미리 적지 않아도 동료에게 편하게 찾아가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프로젝트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힘이 생겼다. 팀미팅이나 업무 중에도 나의 상황과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G가 있다는 사실 덕분에,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된 상태로 하고 싶은 말이나 의견을 편하게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식을 체득해 나갔다.
18. 뒤늦은 승진.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입사 7년차였던 2022년 4월, 마침내 첫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남들은 2-3년만에 이뤄내는 승진인데 나에게는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숫자를 비교하면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7년이라는 시간이 더없이 자랑스럽다. 위기의 순간이 오고 포기하는게 맞나 스스로를 의심할 때, 포기하지 않고 얻어낸 소중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19. 승진, 그 다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