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록을 만들지 않아도 - 달려내는 삶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by 이월의거북

기록을 만들어내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것이 기록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여름밤에 달리기를 한 적이 있다.

무더운 날이었지만 해가 질 즈음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지 않은 땅의 열기와 습하고 무거운 공기는 달리기에 최악의 환경이었고

달리다가 피부 속부터 열이 가득 차 올라 뇌까지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달궈지다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깨달음으로 절대 여름에는 야외런을 하지 말자,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여름은 유독 더웠고 열대야 최장 기록도 깨질 정도로 밤에도 쉽게 온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달을 보낸 후 한동안 비가 많이 오더니 마침내 더위가 한풀 꺾였다.

오랜만에 야외 런을 하기로 하고 저녁 8시쯤 집을 나섰다.

간단하게 몸을 풀고 달리기를 하는데, 체감상으로는 예전만큼 달리고 있다고 느꼈지만

에어팟을 통해 들은 내 페이스는 예전보다 km당 1분이나 뒤쳐진 페이스였다.

현저히 떨어진 페이스를 보고,

내가 안일하게 뛰었나. 약해졌나. 날씨 때문인가. 역방향으로 바람이 부나. 안정적인 자세를 찾기 위해 자세를 조금 바꿔보았는데 그 때문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이유를 찾아본다.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러다가 이 바람, 이 풍경을 다 놓친다.

여름 밤 특유의 진한 풀냄새, 탄천 물 위로 떨어지는 불빛들, 탁 트인 길, 발이 지면을 힘껏 차고 올라가는 이 느낌.


어떤 사람의 유튜브를 봤는데, 30일동안 매일 아침마다 달리기를 실천한 수 그 후기를 말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매일 달렸다'가 아닌 '달려냈다' 라는 표현을 쓰더라.

매일 달려냈고. 오늘도 날려냈다. 달리기를 해냈다.

얼마나 잘 하느냐가 아니라, 오늘치의 달리기를 해내는 일.

그 꾸준함이 중요하고, 하루 하루의 꾸준함이 쌓여 그 사람의 단단함을 이룬다.


얼마나 좋은 페이스로 달렸나, 얼마나 멀리 달렸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달리기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오늘도 달려냈다는 것과, 달리기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 한결같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자기 신뢰. 그 뿐이다. 그냥 달리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달리고, 내일도 달리고, 달려내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페이스는 이렇고, 또 내일의 페이스는 이렇다. 그것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일 뿐,

내 달리기를 판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숫자라는 게 참 묘하다.

어떤 일에든지 숫자가 개입되면 왠지 모르게 숫자에 연연하게 된다.

고통스럽게 뛰면 오늘의 기록을 더 단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내가 지나온 것들이 자연히 기록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기록을 만들기 위해서 고통스럽게 뛰는 게 아닌,

매일 쌓아올린 성실과 실력이 나중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 나타날 것을 믿고.

오늘은 즐겁게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기분 좋게 땀이 흐른다. 기분 좋은 리듬이 생긴다.

발이 지면을 밀어낸다.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이 분다. 달리고 있다.

월요일 연재
이전 01화1. 달리기의 시작 - 별 거 아닌 고통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