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을 때 갈 수 없는 여행지 중 가장 가까운 곳은 유럽이다. 그래서 두 번의 주말과 그 사이에 있는 기나긴 평일 모두가 온전히 내 것일 때 비로소 유럽 여행은 가시권에 놓인다. 구아주 바깥에 있는 여행지는 어차피 견물생심이다. 아무리 여행 유튜버들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를 횡단하다고 해도 쉽사리 따라 할 수 없는 이유다. 유럽 여행은 그래서 값지다.
해가 넘어가려는 23년 12월에 나는 이듬해 첫째 달이 여유로울 수 있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가장 먼저 니스로 가는 항공편을 알아봤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한 해를 안온하게 마무리 한 노력을 기념하고 싶었다. 지중해의 도시 니스는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멀리 있는 따뜻한 바다였다.
니스에서는 버스를 타고 소도시 에즈와 모나코 공국을 당일에 다녀올 수 있다.
마르세유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차를 렌트하면 엑상 프로방스, 아비뇽, 아를 같은 소도시를 금방 다녀온다.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을 급하게 들어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얼른 남프랑스 여행 책을 한 권 샀다. 백과사전 마냥 깨알 같은 정보들이 적혀 있는 여행 책자를 좋아하는데, 구입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이 이미 내 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좋다. 비교적 검증된 정보를 두고두고 천천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남프랑스 여행책에서 내가 고른 두 개의 도시는 니스와 마르세유다. 주변 소도시들을 당일 여행할 수 있는 거점이면서, 오래 머무르고 싶은 장소였다. 니스에서는 모나코 왕국과 애즈, 생 폴 드방스를 갈 수 있고, 마르세유에서는 아비뇽과 아를, 액상 프로방스를 당일에 다녀올 수 있다.
루프트 한자는 달라졌다.
루프트 한자로 뮌헨에서 경유했다. 잦은 연착과 수하물 분실로 악명 높다고 하지만 100만 원도 안 되는 항공권 가격은 뿌리칠 수 없다. 비수기에 가는 유럽은 여러모로 행복하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루프트 한자는 훌륭했다. 기내 컨디션과 승무원의 서비스, 그리고 비상 상황 대처 모두 무엇 하나 빠짐없는 항공사였다. 귀국 편에 문제가 있었는데, 루프트한자였기 때문에 차선책을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낭자한 오명을 벗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평일 오후에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같은 날 저녁에 뮌헨에 도착한다. 그리고 뮌헨 공항에서 니스를 가는 작은 비행기는 두 시간을 더 날아가야 한다. 니스로 곧장 가는 직항은 없다. 그렇게 출발일과 같은 날 늦은 밤에 니스에 도착했다.
니스의 코트다쥐르 공항은 해변 끝에 있다. 해변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쭉 올라오면 시가지에 도착한다.
니스는 작다. 해변의 한쪽 끝에 위치한 공항에서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차로 15분 정도 달리면 시내에 닿는다. 에어비앤비로 구한 숙소는 해변가를 바로 앞에 둔 맨션이다. 도로 옆이라 시끄러운 만큼 파도 소리도 철썩이는 그곳은 원래 "예약이 항상 꽉 차있는 숙소"라고 한다. 친절한 숙소 주인이 체크인을 도와주고 떠난 시간은 밤 열한 시였다.
니스 해변에 있는 맥도날드
허기진 탓에 근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오는 길에 두 가지 문명 충돌이 있었다. 프랑스 맥도날드에서는 키오스크에서 카드결제가 실패해도 영수증 같은 종이가 출력된다. 주문이 이미 들어간 줄 알고 한참을 기다리는데도 햄버거가 나오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캐셔에게 가서 직접 재결제를 하라는 안내문을 받은 것이었다. 카운터 앞을 한참 서성이던 한국인을 바라보는 흑인 캐셔의 시선을 비로소 이해했다.
유럽 가정집의 문은 두껍고 무겁고 열기가 어렵다.
다른 하나는 숙소의 현관문이었다. 오랜만에 열쇠로 잠그는 문이 반가웠는데, 그 문에 대해 숙소 호스트가 한참을 설명하면서 "잘못하면 문을 부수고 비용을 청구할지도 몰라"라며 슬쩍 던지고 간 경고는 흘려들었다. 가까스로 햄버거를 사서 돌아오니 코웃음 쳤던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열쇠를 꽂아서 이리저리 문고리를 돌려봐도 굳건한 문 앞에서 결국 호스트에게 다시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열쇠를 왼쪽 끝까지 돌린 상태에서 힘껏 밀어야 열리는 문이었다. 유럽은 클래식하다. 그리고 작은 도시는 더 고전적이다. 씻고 잠에 든 시간은 새벽 한 시였다.
정확히 4시간 후에 일어났다. 완벽히 실패한 시차적응에 말똥 해진 정신이었지만, 그 새벽에 할 수 있는 건 마땅히 없다. 조금 더 일찍 밖을 나서 산책을 하다가 새벽부터 문을 여는 빵집을 찾아가 아침을 사 오는 수밖에. 그렇게 새벽 산책 끝에 도착한 빵집에서 크로와상과 말차 크로와상, 쇼콜라 크로와상, 샌드위치를 사 왔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나선 니스 사람들도 줄 서서 찾아가는 맛집이었다. 근처 까르푸에서 우유와 물, 과일을 샀다.
Bakery By Michel Fiori 19 Bd Raimbaldi, 06000 Nice, 프랑스
La Boulangerie Par Michel Fiori 는 아침 7시 30분에 문을 연다. 오픈 전에도 현지인들이 줄서서 빵을 기다리는 맛집이다.
각종 크로와상과 쿠키, 그리고 샌드위치를 사 올 수 있다. 현지인들은 역시 에스프레소 한 잔과 크로와상을 먹고 출근한다.
크로와상 하나의 가격은 1.2유로다.
각종 바게트 샌드위치를 판매한다. 잠봉뵈르 샌드위치가 맛있다.
여러 종류의 크로와상이 있다. 말차 크로와상과 초콜릿 크로와상도 맛있다.
마세나 광장으로 향하는 새벽길
푸짐하게 준비한 아침을 먹고 나니 비로소 오전 8시가 되었고, 비가 내렸다. 전날 숙소 호스트가 해준 걱정 그대로였다. 행동반경을 시가지로 좁혔다. 니스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둘러보고 시차 적응을 위해 낮잠을 잤다. 인천에서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로 유럽에 온다 다음날 낮잠 일정을 꼭 추가하자.
니스 신시가지
니스 구시가지
니스 구시가지의 와인 판매점
니스 구시가지
와인 판매점에서 로제 와인을 사 왔다. 로제 와인은 남부 프랑스 지역의 특산물이다.
휘휘 둘러본 비 오는 니스는 운치 있었다. 비가 와서 추웠고 그만큼 이곳도 겨울임을 실감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곧 맑아질 날씨를 기다리며 여유로웠다. 낮잠을 청하는 로제 와인을 마시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니스에 오기 전부터 염두에 둔 배스구이를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Boccaccio 7 Rue Massena, 06000 Nice, 프랑스
지중해식 음식점 Boccaccio는 오후 12시부터 2시간 정도 잠깐 영업을 하고 5시간의 Break Time을 갖는다. 오후 7시에 다시 문을 열고 밤 11시까지 운영한다.
겨울이지만 비닐 천막으로 만든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니스 사람들은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생선과 갑각류, 조개 등은 어느 식당에서나 준비되어 있는 식재료다. 내가 선택한 첫 번째 저녁 식사 메뉴는 배스구이였다. 30cm가 넘는 커다란 배스를 통으로 구워서 가져다준다. 요리의 전체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는 다시 가져가 먹기 좋은 크기로 해체해 준다. 함께 주는 소스와 곁들여 먹으면 일품이다. 크기가 큰 만큼 가격도 비싸지만 가치 있다. 실컷 낮잠을 보충했지만 함께 마신 화이트와인에 취해 저녁잠도 일찍 들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일찍 일어났다.